미국 뉴멕시코주 산타페에 만들어진 목조 교회 세트장. 2021년 10월 21일 이곳에서 알렉 볼드윈이 제작자이자 주연으로 참여한 서부영화 ‘러스트(Rust)’ 촬영이 진행 중이었다.
신광영 국제부 차장
세트장 안에는 주연 배우 앨릭 볼드윈(64)이 얼어붙은 채 서 있었다. 그가 방금 전 리허설했던 장면은 대본에 이렇게 나와 있었다. ‘무법자(볼드윈)는 포위해 오는 보안관과 맞서기 위해 교회 의자에 앉아 총을 쏘기로 결심한다.’
영화는 농장주를 우발적으로 살해한 10대 손자가 교수형을 면하도록 분투하는 백발의 무법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리허설이 시작되자 볼드윈은 어깨의 권총 지갑에서 45구경 구형 리볼버를 꺼냈다. 총은 가슴을 지나 카메라 렌즈 쪽으로 향했고, 곧 총성이 울렸다.
2021년 10월 21일 미국 뉴멕시코주 사막 지대에 설치된 서부영화 세트장에서 배우 앨릭 볼드윈이 촬영 도중 총기 사고를 낸 뒤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AP 뉴시스
사건 1년 3개월 만인 지난달 31일 볼드원은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됐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강력한 총기 규제를 주장해 와 전미총기협회(NRA)에서 눈엣가시로 여기던 인물이었다.
볼드윈이 세트장에서 집어든 권총은 소품담당자, 무기관리자, 조감독의 손을 거쳤다. 무기관리자는 소품담당자가 가져온 탄환이 공포탄이 맞는지 확인해 총에 장전하고, 조감독은 쏴도 안전한지 다시 점검해 배우에게 건네는 역할을 한다. 당시 조감독은 볼드윈에게 총을 주면서 “콜드건(공포탄이 든 총)”이라고 말했지만 방아쇠 앞에 실탄이 꽂힌 상태였다.
사건 당시 볼드윈에게 건네진 45구경 구형 리볼버 권총. 탄창 대신 실린더에 총탄을 넣는 여러 개의 약실이 있다. Santa Fe County Sheriff’s Office
촬영 중 실탄이 발사돼 제작진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 목조 교회 세트장에 경찰관들이 진입해 증거를 수집하고 있다. AP 뉴시스
하지만 검찰은 볼드윈 역시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봤다. 배우는 총기의 최종 사용자로서 안전 확인 의무가 있고, 사람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지는 말았어야 했다는 것이다. 검찰 공소장에는 볼드윈이 촬영 전 총기 안전 훈련에 참여하지 않았고, 이후 안전 교육 때도 가족과 통화하는 등 집중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사건 5일 전 촬영장에서 2차례 총기 사고가 있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소품담당자가 발밑에 총을 겨누다가 총이 발사됐고, 몇 시간 뒤 스턴트맨이 또다시 실수로 소총을 쐈다고 한다. 영화 제작자이기도 했던 볼드윈은 참사를 예고하는 이런 신호를 흘려보냈다.
2019년 12월 영화 ‘아키네미(Archenemy)’를 촬영 중인 할리나 허친스 촬영감독. 허친스는 2021년 10월 영화 ‘러스트’ 촬영장에서 총에 맞아 10살 아들과 남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우크라이나계인 그녀는 키이우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한 뒤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건너와 영화를 공부했다. AP 뉴시스
볼드윈이 촬영 도중 자신이 쏜 총에 촬영감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세트장 한 구석에서 허리를 굽힌 채 괴로워하고 있다. AP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