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 속 그리스 철학자 파르메니데스(기원전 6세기 중반∼기원전 5세기 중반). 그는 ‘있는 것’에 최초로 의문을 품고 탐구한 서양 존재론의 아버지였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서양 문명의 두 원천, 유대 문명과 그리스 문명은 서로 이질적이다. 하나는 종교적이고 다른 하나는 철학적이다. 하지만 둘을 이어주는 공통의 질문이 있다.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지혜를 사랑한 그리스인들에게 이 질문은 모든 것에 대한 앎의 시작이었다. 모든 것은 있는 것이니까. 야훼에 대한 경외를 지혜의 근본으로 여긴 유대인들에게도 있는 것에 대한 앎은 막중한 문제였다. 있는 것을 모르고서 어떻게 ‘스스로 있는 자’ 야훼를 알 수 있을까? 하지만 있는 것은 무엇인가? 파르메니데스는 이런 의문을 품은 최초의 철학자였다.》
생성과 변화는 모두 ‘가짜’다
‘있는 것’ 혹은 ‘있음’을 연구하는 분야를 ‘존재론’이라고 부른다. 서양 철학의 딱딱한 핵심 분야이다. 하지만 존재론의 최고 진리는 철학의 문외한이라도 알 수 있다. ‘있는 것이 있고, 있지 않은 것은 있지 않다’는 진리이다. 이 진리는 ‘1+1=2’보다 더 자명하다. ‘있는 것이 있지 않고 있지 않은 것은 있다’는 말은 모순이니까.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자명한 진리에서 존재론의 모든 문제가 등장한다. 있는 것의 있음과 없는 것의 없음을 받아들이면 이상한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세상에 있는 것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다. 왜 그럴까?
파르메니데스의 고향인 이탈리아 남부 엘레아(현재의 벨리아)의 발굴 현장. 엘레아는 기원전 6세기 중반 그리스인들이 이주해 정착한 도시였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여신을 만나 명령을 받다
지혜의 여신 아테나 흉상. 파르메니데스는 존재론을 전개하면서 아테나가 아닌 익명의 여신을 끌어들여 기존의 전통을 뒤집고자 했다.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파르메니데스에게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은 없다”의 진리는 여신의 계명, 십계명보다 더 엄한 명령이었다. “내 앞에 다른 신들을 있게 하지 마라.” 이것이 십계명의 첫째 명령이다. 오직 ‘스스로 있는 자’ 야훼를 인정하라는 말이다. 여신의 명령도 같다. “결단코, 있지 않은 것이 있다고 억지를 부려서는 안 된다.” 하지만 여신의 명령이 더 엄중하다. 십계명은 야훼 이외의 신들을 부정할 뿐 부모도, 이웃도 인정하지만, 여신의 명령은 있는 것 이외의 어떤 것도 부정하기 때문이다. 여신은 야훼보다 더 질투가 강한 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있는 것만 생각해야 한다!’ ‘없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파르메니데스가 전한 명령은 후대 철학자들을 엄청나게 괴롭혔다. 생성·소멸하고 다양한 성질을 갖고 운동하는 자연 세계의 존재를 어떻게 부정할 수 있나? ‘있는 것이 있고, 있지 않은 것은 있지 않다’는 진리와 변화무쌍한 자연의 현실을 조화시킬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철학자들은 있음의 진리와 자연의 존재를 화해시킬 사유의 좁은 사잇길을 찾아야 했다. ‘없는 것이 있다’고 말하는 데 모순이 없음을 증명해야 했다. 훗날 그 길을 찾으며 플라톤은 그런 증명을 ‘부친 살해’라고 불렀다. 생각 속에서 파르메니데스를 죽여야 했던 것이다.
삶과 죽음 차이조차 사라진 경지
왜 파르메니데스는 그토록 ‘있는 것’에 집착했을까? 철학자들이 그의 주장을 궤변으로 무시해 버리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현실의 친숙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몰두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맞다. 하지만 모든 점에서 맞는 것은 아니다. 있는 것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것은 없으니까. 나와 네가 있고, 사랑과 분노가 있고, 바다가 있고 집이 있고….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의문을 품는 순간 우리는 아주 낯설고 어려운 문제 앞에 마주 선다. ‘있다’는 도대체 무슨 뜻인가? 우리 주변에 ‘있는 것’들을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21세기의 철학자들도 ‘있음’이라는 친숙하면서도 낯선 대상을 놓고 고민을 거듭한다.
인간이 항상 경계를 넘어서는 ‘실존적’ 존재라는 점을 다시 떠올려 보자(본보 2022년 11월 18일자 칼럼 참고). 있는 것에 대한 물음은 인간을 실존의 극한으로 몰고 간다. 있는 것을 찾는 정신의 운동은 모든 경계를 넘어선다. 나와 너, 사람과 동물,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가 사라진다.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들은 모두 하나이니까. 있는 것에 대한 물음은 그 모든 것에 대한 물음이면서 그중 어떤 것도 아닌 것에 대한 물음이다. 그런 뜻에서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것을 모든 측면에서 똑같고 끝없이 뻗어 있는 “둥근 공”에 비유했다. 이 경지에서는 삶과 죽음의 차이조차 사라진다.
화가 피카소는 익숙한 것들을 분해하고 재배치해서 일상의 대상들을 낯선 시선으로 보도록 만들었다. 추상화가들은 친숙한 것을 낯선 것으로, 복잡한 것을 단순한 것으로 바꿔 새로운 시각 경험의 세계를 열어 놓는다.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은 그런 추상화의 경지까지 훨씬 뛰어넘는다. 모든 색깔과 형태마저 지워 버리니까. 가장 친숙한 것을 가장 낯선 시선으로 보게 하는 것, 그런 시선으로 세상과 대면하게 하는 것, 파르메니데스에게서 시작된 존재론은 그런 경험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낯선 경지의 체험에서 오는 전율이나 희열과 함께.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