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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건 의결 6개월간 반대 단 1표… 금융지주 ‘거수기 사외이사’

입력 | 2023-02-10 03:00:00

[금융사 ‘거수기 이사회’] 4대 금융지주 작년 보고서 분석
34명 사외이사 평균 재임 3년5개월
“경영진에 쓴소리땐 기피인물 찍혀”
“인재 풀 제한, 연임 불가피” 지적도




국내 비상장 기업 대표를 지낸 A 씨(69)는 2013년 한 금융지주사의 제의로 사외이사를 맡았다. 그는 2년 동안 200건 가까운 금융지주사 이사회 안건을 의결했지만 한 번도 반대 의견을 내지 않고 모두 찬성표를 던졌다.

A 씨는 2년 임기를 마친 뒤 해당 그룹의 자회사로 자리를 옮겨 2년을 더 일했고, 또다시 같은 금융지주의 은행에서 1년을 더 채웠다. 그렇게 5년을 동일한 금융그룹의 사외이사로 일하면서 A 씨는 매달 평균 430만 원을 받았다.

‘주인 없는 기업’으로 불리는 주요 금융사의 이사회가 사실상 경영진을 위한 ‘거수기’로 전락하면서 유명무실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금융당국이 최근 최고경영자(CEO)의 ‘셀프 연임’을 막기 위해 이사회의 견제, 감시 기능 강화에 착수하고 나선 데도 이런 배경이 자리하고 있다.
●93건 의결할 때 반대표는 단 하나

동아일보가 지난해 상반기(1∼6월) KB국민, 신한, 하나, 우리 등 국내 4대 금융지주사 반기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총 93건의 안건 중 100%인 93건이 이사회에서 찬성 의결됐다. 또 6개월간 이사회 표결 과정에서 나온 반대표도 단 1표에 불과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독립적인 위치에서 경영진의 잘못된 판단이나 전횡을 막아야 되는 이사회의 기능이 사실상 무력화돼 있다는 징표로 풀이된다.

금융사 사외이사들이 소신껏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은 이들 상당수가 ‘생계형’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1억 원 가까운 연봉을 받는 사외이사 자리가 사실상 하나의 직업과 다름 없이 인식되면서 연임이나 다른 기업 사외이사 자리 확보를 위해 굳이 경영진과 각을 세우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한 전직 사외이사는 “경영진에게 쓴소리를 많이 할 경우 ‘사외이사 업계’에서 기피 인물이 돼 도태될 수 있다”며 “억대 연봉에 가까운 자리가 은퇴 후 생계를 위한 일자리라면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기 힘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4대 금융지주 34명 사외이사 가운데 절반은 대학이나 공직, 금융사 등 현업에서 물러난 퇴직자로 1인당 평균 8000만 원 이상의 보수를 받는 것으로 집계됐다.

또 다른 전직 사외이사는 “어떤 금융사는 사외이사가 아무런 역할을 안 해주기를 원하는 곳도 있다”며 “말썽꾸러기로 소문 나서 좋을 것이 없기 때문에 사외이사들이 회사에 ‘갑’이 아니라 순한 ‘을’이 돼 버린 상황”이라고 했다.

경영진과 이사회가 ‘서로가 서로를 임명하는’ 유착 관계에 빠져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CEO가 사외이사 선임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그로 인해 선임된 사외이사들이 해당 CEO를 연임시키는 순환 구조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경영진과 친밀한 관계를 쌓은 사외이사가 여러 차례 연임을 하거나 여러 계열사의 사외이사를 돌아가면서 맡는 ‘돌려막기’로도 이어진다.

가령 현재 한 금융지주사 사외이사로 활동 중인 B 씨(60)는 처음 3년간은 이 금융지주의 계열사 사외이사를 지낸 뒤 다시 6년째 지주사 사외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교수 출신의 한 전직 사외이사는 “자회사들을 십분 활용하면 최대 9년까지 한 그룹의 사외이사로 활동할 수 있다”며 “계속 자리를 유지하려면 경영진에게 다른 의견을 내기가 힘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4대 금융지주 사외이사 34명의 평균 재임기간은 3년 5개월로 조사됐다. 사외이사의 첫 임기가 보통 2년, 연임 임기는 1년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2, 3연임이 관례화돼 있다는 의미다.

최근 금융지주 사외이사를 지내다가 이사회에서 이례적인 반대표를 던지고 자진 사퇴한 변양호 VIG파트너스 고문은 “회장 선임 과정 등에서 이사회가 제 역할을 못 한다는 자괴감이 들어 사임을 선택했다”며 “이사회가 경영진에게 책임을 적극적으로 물을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사회 논의 과정 투명히 공개해야”

금융사들은 사외이사가 거수기라는 비판에는 일부 오해도 있다고 설명한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이사회는 사전에 이미 조율된 방안을 최종적으로 논의하는 자리라서 찬성률이 높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사외이사로 활용할 수 있는 인재 풀(pool)이 너무 제한적이라 연임이나 돌려막기가 불가피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현재의 금융사 이사회 구조와 운영 방식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이사회가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기 힘든 상황을 악용해 일부 경영진이 회사를 사유화하는 게 금융사 지배구조 문제의 본질”이라며 “회장 추천 같은 주요 사안은 논의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이사회 구성 단계에서도 금융당국이 적극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조명현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좁은 네트워크 안에서 쓴소리를 꺼리는 이사회 문화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며 “이사들이 서로를 평가하는 등의 방식도 검토해볼 만하다”고 밝혔다.


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신지환 기자 jhshin93@donga.com
강우석 기자 ws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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