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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광암 칼럼]온 국민 노후를 담보로 한 불장난 ‘연금 관치’

입력 | 2023-02-13 03:00:00

민영화 20년 넘도록 되풀이돼온
KT·포스코 CEO 흑역사
이젠 국민연금까지 동원하나
30조 적자 한전 보면 ‘연금관치’ 미래 보여



천광암 논설주간


공기업이던 포스코와 KT가 민영화된 것은 각각 2000년과 2002년의 일이다. 20년도 넘었다. 포스코 최정우 현 회장과 KT 구현모 현 대표는 모두 민영화 이후 5번째 최고경영자(CEO)다. 전임자들은 대부분 끝이 좋지 않았다. 검찰의 집중적인 수사를 받고 ‘타의로’ 자리를 내놨거나, 수사가 저인망처럼 조여 오자 자진사퇴 형식으로 화(禍)를 피했다. 두 번째 임기까지 채운 황창규 전 KT 회장도 불기소 처분을 받기는 했지만 수사의 칼날을 피하지는 못했다.

이전 정권에서 임명한 CEO는 일단 ‘몰아내고 본다’는 것이 공식처럼 되풀이되다 보니 벌어졌던 일이다. 여기에는 보수정권이든 진보정권이든 예외가 없었다. 권력형 비리가 만연했던 5, 6공 시절을 배경으로 한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난 니가 깡팬지 아닌지는 관심이 없어. 넌 내가 깡패라고 하면 그냥 깡패야.” 영화 속 검사가 극 중 피의자에게 하는 말이다. 역대 정권이 이른바 ‘국민 기업’인 포스코와 KT를 대해온 방식이 딱 이런 식이었다.

이는 ‘민간 주도 경제’를 기치로 내건 윤석열 정부도 예외가 아닌 듯하다.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국민연금이 전면에 나섰다는 점이다. 최근 국민연금의 공개적인 압박에 KT 이사회는 CEO 선임과 관련해 지금까지 밟아온 절차를 백지화하고 새롭게 공개경쟁 방식의 공모 절차를 진행하기로 했다. 국민연금이 KT 1대 주주의 자격으로 CEO 선임에 대한 의사를 밝힐 수는 있다. 다만 CEO 후보자의 경영 성과와 자격, 절차적 공정성에 대해 객관적이고 투명한 판단 근거는 제시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드는 의문이다.

먼저 경영 성과. 지난해 KT는 1998년 상장 후 처음으로 매출 25조 원을 돌파했다. 영업이익으로는 1조6901억 원을 벌었다. 이에 따라 국민연금은 526억9000만 원을 현금으로 배당받았다. 둘째 구 대표의 자격과 관련해 ‘국회의원 쪼개기 후원금’ 사건 간여 정도다. 구 대표는 이로 인해 벌금형 약식명령을 받았으나 이에 불복해 정식 재판을 청구했다. KT 규정상 금고 미만은 CEO 결격 사유가 아니다. 그래서인지 국민연금은 이런 것들보다는 주로 CEO 선임 절차의 공정성을 문제로 삼고 있는데, 그마저도 구체적인 설명이 부족하다.

가장 우려스러운 대목은 정치권력이나 정부가 배후에 있는 ‘연금 관치’ 가능성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과거 정부투자기업 내지는 공기업이었다가 민영화되면서 소유가 분산된 기업들은 ‘스튜어드십’이 작동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흘 뒤 열린 국민의힘 비상대책회의에서는 포스코, KT 등을 콕 집는 발언이 나왔다. ‘관치’가 아니라고 굳이 부인할 생각도 없어 보인다. 30일 열린 세미나에서 한 여당 의원은 “단기적으로 ‘관치’라는 비판을 받더라도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해 완전 민영화된 우리금융의 경우는 국민연금 대신 금융위원장과 금융감독원장이 나서서 총대를 멘 경우지만, ‘관치 부활’이라는 맥락에서 무관치 않아 보인다. 전임 CEO의 3연임을 저지하고, 만들어진 빈자리를 꿰찬 것은 ‘모피아 적통’에 해당하는 임종룡 전 금융위원장이었다. 우리금융 민영화는 뭘 위한 민영화였나.

2010년 영국에서 시작된 ‘스튜어드십 코드’는 남의 돈을 맡아 관리하는 금융기관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규칙을 정리한 것이다. 핵심은 충직한 집사처럼 주인의 이익을 배신하지 않는 것이다. 무작정 남의 것을 베낄 일이 아니다. 우리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은 전 국민의 소중한 노후자금을 지키는 데 모든 코드가 맞춰져야 한다. 관치나 정치권력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립성을 갖추는 것이 제1번 코드가 돼야 한다. 과거 한국 경제를 국가부도의 수렁으로까지 몰아넣었던 ‘관치의 망령’을 무엇보다 경계해야 한다.

‘국민연금이 관치에 동원된 미래’를 상상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탈원전이나 전기요금 포퓰리즘 등 정부 정책에 발목이 잡혀 작년 한 해 동안에만 30조 원이 넘는 적자를 낸 한전의 ‘꼴’을 보면 된다. 우선은 소유 분산 기업이 대상이라고 하지만, 연금 관치의 물꼬가 일단 트이면 대상이 확대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번 정권이 선을 넘지 않는다고 해도, 다음 정권까지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윤석열 정부가 ‘연금 관치’의 막을 열어 국민연금의 고갈을 더 앞당겼다는 평가를 받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