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표 품은 퇴준생들] 청년-기성세대 ‘퇴사’ 인식 조사 기업들 “적응할 만하면 그만둬”
대기업에서 3년째 근무 중인 김규진(가명·28·여) 씨는 스스로를 ‘퇴준생(퇴직 준비생)’이라고 불렀다. 6개월 이내 퇴사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김 씨는 “지금 다니는 회사에 큰 불만은 없다. 점수로 치면 좋지도 싫지도 않은 70점”이라면서도 “더 나은 근무 환경과 보수를 주는 곳을 찾아 조만간 옮길 생각”이라고 했다.
취업난을 뚫고 취직에 성공했지만 금세 퇴사하는 청년들이 늘고 있다. 청년층 사이에서 ‘퇴준생’이라는 단어가 일상적으로 사용되며 한국판 ‘대사직 시대(Great Resignation)’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동아일보는 지난달 4∼11일 재단법인 청년재단과 여론조사업체 서던포스트에 의뢰해 청년(만 19∼34세) 500명, 기성세대(만 35세 이상) 500명을 대상으로 ‘청년 퇴사’에 대한 인식 등을 온라인 조사했다. 이후 포커스그룹 및 개별 인터뷰를 추가로 진행했다.
청년들 “퇴사는 프로선수 이적 같은 도전” 기성세대 “애사심 필요”
〈상〉 떠날 준비된 청년들… “자발적 퇴사 긍정적” 74%
청년들 “회사 문 닫으면 나는 누가 책임지나… 스펙쌓기 필수”
기성세대 56% “자발적 퇴사 부정적”… “잦은 이-퇴직 무책임”
전문가 “불안정한 시대… 보상-비전 등 회사가 먼저 제시해야”
“프로스포츠에서도 조건만 맞으면 선수들이 구단을 옮기잖아요. 직장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성장 위한 과정” vs “잦은 이직은 무책임”
추가로 진행한 포커스그룹 및 개별 인터뷰에서 청년들은 퇴사를 ‘성장을 위한 도전’ 또는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여긴다고 밝혔다. 건축회사에 다니는 윤성연(가명·27) 씨는 “어떤 회사에 다니든지 나한테 정말 맞는 곳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가치관과 더 맞는 곳을 찾는 과정이 퇴사”라고 했다.
주변에서 퇴사를 고민하는 동료나 선후배가 있다면 “퇴사를 적극 권유하겠다”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직장인 하준우(가명·31) 씨는 “평생 직장이 어디에 있느냐. 좋은 조건이 있다면 당연히 이직하는 것”이라며 “나 역시 6개월 이내 퇴사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했다.
반면 기성세대 중에는 여전히 퇴직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중소 건설업체 대표 김현수(가명·58) 씨는 “직원을 채용하고 직장에 적응하도록 돕는 과정에 기업의 노력과 비용이 든다”며 “일단 한곳에 몸 담기로 했다면 최소 수년 동안은 애사심을 갖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외국계 중견기업 대표를 지낸 고재황(가명·66) 씨도 “불가피한 경우는 어쩔 수 없지만 경영진 입장에서 퇴직은 ‘다 키워 놨더니 나간다’는 느낌이 든다. 잦은 이·퇴직은 무책임한 행동으로 보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달라진 직장관, 청년 퇴직에 영향
직장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차이가 있었다.반면 기성세대의 경우 회사와 자신의 성장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상대적으로 강했다. 황기돈 나은내일연구원 원장은 “청년들에 비해 직장을 구하기 쉬웠던 기성세대는 입사 후에도 ‘일하다 보면 책임자, 간부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희생과 헌신을 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봉준 미래인재연구소 소장도 “지금은 개인이 열심히 해도 정리해고당할 수 있고, 회사도 쉽게 문을 닫을 수 있는 불안정한 시대”라고 “이런 맥락에서 청년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퇴사 막는 대책은 필요” 청년층도 공감
다만 청년들의 자발적 퇴사가 급격히 늘어나는 현 상황에 대해선 청년 10명 중 6명(59%)은 “사회적 문제로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답했다. 기성세대의 경우 67%가 같은 답변을 했다.늘어나는 퇴사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청년 중에는 ‘근무시간 보장, 자유로운 휴가 사용 등 근로환경 개선’을 꼽은 이들이 47%로 가장 많았다. ‘더 높은 임금 제공’과 ‘수직적·강압적 조직문화 개선’이 21%씩으로 뒤를 이었다. 김 소장은 “퇴사하기까지 개인이 보고 느낀 조직의 문제점과 비합리적 조직 문화는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답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장예찬 청년재단 이사장은 “잦은 이직과 퇴직을 청년층의 탓으로만 돌릴 게 아니라 청년들이 일하고 싶은 직장을 만들기 위해 기업이 어떤 보상과 비전, 근무환경 등을 제시했는지 먼저 돌아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곽도영 기자 now@donga.com
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