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 전세시장 ‘사기 후폭풍’]“빌라 전세사기 당할라”… 전세→월세 전환 2배로 빌라왕 사건 이후 전세 불신 확산 수도권 월세 변경 5.2%→10.4% 전세 거래-전셋값도 대폭 떨어져
직장인 정모 씨(34)는 2년 전 결혼해 서울 강동구의 소형 빌라(전용면적 42㎡)에 전세로 살고 있다. 전세보증금은 3억6000만 원. 최근 계약 만기를 앞두고 알아보니 비슷한 빌라 전셋값이 약 3000만 원 떨어졌지만, 그는 월세로 갈아탈 계획이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 빌라에 살던 지인이 ‘빌라왕’ 김모 씨로부터 전세 사기를 당해 전세금을 날릴 위기에 처한 걸 지켜봤기 때문이다. 정 씨는 “모아둔 현금이 있어 전세로 갈 순 있지만 불안에 떨기 싫어 월세만 알아보는 중”이라고 말했다.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한 ‘전세 사기’ 후폭풍으로 빌라 임대차 시장이 급변하고 있다. 신뢰를 잃은 전세 대신 월세를 선택하는 세입자가 늘면서 빌라 전세 거래량이 급감하고 전셋값도 큰 폭으로 하락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서민 주거 안정을 책임지던 빌라 전세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상〉 빌라전세 불신에 월세 전환 급증
사기 앞에 중개사-반환보증 무기력… 수도권 빌라 전세 거래량 18% 감소
수요자들 “전세제도 신뢰 무너져”… 전문가 “세입자 주거비 급증 우려”
서울 광진구에서 신축 원룸 빌라 전세를 살고 있는 정모 씨(32)는 계약기간이 지난해 11월 끝났는데도 일단 살고 있다. 전세 보증금 2억6000만 원을 돌려받지 못해서다.
그는 계약일로부터 1년이 지난 뒤에야 은행을 통해 집주인이 바뀐 사실을 알게 됐다. 심지어 집주인 변경 등기가 이뤄진 날은 정 씨가 전입 신고를 한 당일이었다. 전세 계약과 동시에 바뀐 집주인은 바로 ‘빌라왕’ 김모 씨였다.
빌라 임대차 시장에서 전세에 대한 신뢰는 무너질 대로 무너졌다. 공인중개사와 공공기관의 전세보증금 반환보증 등 신뢰를 담보하던 각종 제도가 전세사기에 무력했다는 인식이 커진 영향이다. 이대로라면 빌라 전세 근간이 무너지고 월세 부담이 커지면서 서민 주거비 부담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 6개월째 남의 집 전전…“HUG도 못 믿는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한 빌라에 전세로 살던 30대 초반 직장인 A 씨는 지난해 계약이 종료됐지만 집주인에게 전세금을 못 받고 친구 집을 전전하고 있다. 처음엔 집주인의 ‘배 째라’식 태도에도 걱정이 없었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전세보증보험에 가입했기 때문이다. HUG로부터 “금방 대위변제가 이뤄질 것”이란 답변을 들은 그는 이를 믿었다. 이제라도 내 집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에 인근 다른 빌라를 사기로 하고 계약했다. 하지만 A 씨는 아직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한 상태다. 매매 계약금도 날릴 위기에 처했다. 그는 “나중에 HUG에 항의하자 대위변제 대상자가 급증해서 6개월 정도 걸릴 것이란 답변만 돌아왔다”며 “현재 거주지가 없어 지인 집을 떠돌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불신은 세입자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정부가 최근 전세사기를 예방하기 위해 선보인 ‘안심전세 앱’이 나오기 전인 지난해 말부터 이미 민간 업체가 만든 전세사기 예방을 위한 앱 여러 개가 성업 중이다. 온라인 부동산 커뮤니티에는 “나도 혹시 전세사기 피해를 입은 것 아니냐”란 문의 글이 하루에도 여러 건 올라오고 있다.
● “보증금 떼일까 봐”…빌라 전세량·가격 동반 하락
지난해 고금리에도 별다른 변동을 보이지 않던 빌라 전셋값도 비슷한 시기부터 급락하고 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수도권 다세대·연립(빌라) 전세가격지수는 지난해 1월 102.2에서 10월 102.3으로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전세가격지수는 101.7로 전달 대비 0.54% 떨어졌고, 12월(100.7)에는 하락 폭을 ―0.94%로 키웠다. 이처럼 지난해 11월부터 가격 하락 폭이 커지며 지난해 빌라 전세는 전년 말 대비 1.25% 떨어졌지만 월세는 오히려 0.62% 올랐다.
우병탁 신한은행 WM컨설팅센터 부동산팀장은 “빌라 전월세 시장이 월세 위주로 재편되면 피해를 보는 것은 주거비 부담이 늘어날 세입자들”이라며 “전세사기 대책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국회의 협조와 범정부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순구 기자 soon9@donga.com
송진호 기자 jino@donga.com
이축복 기자 bles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