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방한용품 못받아”…야외 근로자들, 한파에 한랭질환 사각지대

입력 | 2023-02-14 18:36:00


“건설 현장에서만 40년 가까이 일했는데 휴게시설은 한 곳도 없었어요. 방한도 안 되는 목장갑을 내 돈으로 사서 써야 하는 판에 뭘 더 바라겠습니까.”

14일 서울 성동구의 한 건설 현장에서 만난 건설근로자 조모 씨(69)는 야외에 설치된 난로 앞에서 몸을 녹이며 이렇게 말했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며 올겨울 한파가 이어지면서 동상이나 저체온증 등 한랭(寒冷)질환 환자가 지난해 겨울보다 약 64%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건설 현장 등 야외 근로자들의 근무 환경이 한층 열악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14일 서울 성동구의 한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들이 건물을 짓기 위해 야외 작업을 하고 있다. 현장에서 근무하는 근로자 조모 씨(69)는 이날 본보 기자에게 “아무리 추운 날에 하는 야외 작업이어도 방한용품을 따로 주진 않는다”며 “목장갑도 내 돈으로 사서 써야한다”고 말했다. 최원영 기자 o0@donga.com



● “내 돈으로 산 목장갑 하나로 버텨”

간이 천막이나 주차장 등 한파에도 야외에서 일해야 하는 택배 물류센터 근로자 상황도 비슷하다. 올해 1월부터 택배회사 물류센터에서 상하차, 분류 작업을 하고 있다는 취업준비생 A 씨(20)는 “날이 추워 일을 하다 보면 머리에 맺힌 땀과 함께 머리카락이 다 얼어붙는다”며 “목장갑 하나에 의지하다 보니 부은 손에 동상을 입어 감각이 무뎌질 정도”라고 말했다.

14일 동아일보 취재팀이 CJ대한통운(5곳), 롯데택배(2곳), 한진택배(2곳), 로젠택배(2곳) 물류센터 총 11곳을 확인한 결과 업체들은 모두 근로자에게 플라스틱 안전모와 목장갑만을 지급하고 있었다. 택배사 측은 “물류센터 근무 환경 관리는 도급업체의 몫”이라며 “따로 파악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한 택배업계 관계자는 “근로자들에게 귀마개와 장갑, 목싸개, 핫팩 등을 모든 물류센터에 지급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해당 택배업체가 관리하는 현장 근로자들은 “방한용품을 한 번도 제공받은 적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 한파 취약하지만 현행법상 ‘한랭작업’ 아냐

건설·택배업 등 한파에 취약한 근로자들에게 방한용품이 지급되지 않는 이유는 이들이 현행법상 ‘한랭작업’ 종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상 고용주는 ‘한랭작업’을 하는 근로자에게만 방한용품과 휴게시설을 제공할 의무를 갖는다. 산안법에서는 한랭작업을 ‘다량의 액체공기, 드라이아이스 등을 취급하는 장소 혹은 냉장고, 제빙고, 저빙고 또는 냉동고 내부에서 하는 일’로 규정한다.

한랭작업을 하는 시설에서 고용주는 근로자에게 방한용품 미지급 시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된다. 또한 휴게시설을 갖추지 않을 경우에는 1500만 원의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

그러나 한파에 노출되는 일반적인 야외 작업 현장은 ‘한랭작업’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보호 조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한랭질환 예방 안내를 하는 수준이 전부지만 이마저도 현장서는 “무용지물”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최근 3년간 6곳의 택배 물류센터에서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이태영 씨(26)는 “예방가이드나 현장점검표는 어느 작업장에서도 본 적이 없다”며 “목장갑과 두께가 비슷한 얇은 방한용 털장갑만 줘도 동상에 걸리지 않고 작업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14일 오후 서울 성동구 행당시장 인근에서 장사하는 김모 씨(69)가 150kg에 이르는 손수레를 끌고 시장으로 가고 있다. 김 씨는 “장갑을 두세 겹으로 착용하고 수레를 밀어도 겨울엔 손이 꽁꽁 언다”고 하소연했다. 최원영 기자 o0@donga.com



● 폭염과 한파, 같은 기준으로 대처해야

전문가들은 겨울철 야외 근로자에 대한 보호 조치가 여름철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느슨하다고 지적한다. 폭염 시엔 야외 근로자들에게 휴게시설을 의무적으로 제공하고 휴게시간을 보장해야 하지만 한파 관련 보호 규정은 없기 때문이다.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한파 관련 보호 규정이 미미해 한랭 산업재해는 계속 발생하고 있다”며 “올해 한랭질환자가 급증한만큼 예방 차원에서 더욱 신경 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17년 12월부터 지난해 3월까지 산업현장 내 한랭질환을 인정받은 재해자 45명은 대부분 야외 근로자였다. 재해가 가장 잦은 업종은 건설업(9명)이었고 택배 물류센터에서 손가락 동상을 입은 피해 사고도 2건 발생했다.

이에 대해 고용부 관계자는 “사업주가 구체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한랭질환 예방가이드를 정비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최원영 기자 o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