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유석 서울대 공대 학장
10일 만난 홍유석 서울대 공대 학장은 “4차 산업혁명은 기술을 바탕으로 세상에 없던 시스템과 산업을 만드는 것”이라며 “대학이 산학협력과 창업을 통해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기술주권을 확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한국의 주력 산업인 반도체 업계는 인력 수급에 대해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현재 고교와 대학, 대학원에서 배출되는 반도체 관련 인력은 연평균 5000명 수준. 하지만 한국반도체산업협회는 2021년 17만 명 수준인 반도체 인력이 2031년에는 총 30만 명까지 필요할 것으로 전망한다. 이대로 가면 필요 인력에 비해 공급이 절반을 한참 밑도는 것이다. 정부가 2031년까지 15만 명의 반도체 인력 양성 계획을 내놓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인력 양성의 최전선에 있는 홍유석 서울대 공대 학장(57)은 “정부의 관심이 반갑긴 한데 아직 청사진만 있고 디테일이 부족하다”며 “구체적 실행 방안을 채우는 것이 관건”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6월 임명된 홍 학장에게 반도체 인력 문제를 비롯해 최근 이슈가 된 의대 쏠림 현상과 ‘문과 침공’, 챗GPT 열풍 등에 대해 물었다.》
―다음 달 공대에 임용되는 교수 17명이 1명 빼고는 30, 40대이고, 미국의 빅테크 기업인 인텔과 메타에서 일하다 온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해외 빅테크 기업에서 온 분들은 연봉 차이가 날 텐데 애국심에만 호소할 수 없는 것 아니냐.
“설득 작업이 힘들지만 아직 한국인에겐 애국심에 호소하는 게 먹힌다(웃음). 국민의 눈높이에선 적다고 할 수 없지만 그분들 입장에선 아쉬운 액수다(기존 연봉의 절반은 되느냐고 묻자 어림도 없다는 의미로 손을 내저었다).”
―서울대 법인화가 10년이 넘었는데 인력 관련 문제에 융통성을 갖기 어려운 건가.
“예를 들면 산업체 석좌교수 제도 같은 게 허용이 안 된다. 교수가 특정기업과 연계해 일을 하면 그 기업에서 상당한 급여를 따로 받는 제도인데, 서울대 권위가 사라진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일리가 있지만 지금은 문을 열어줄 때가 됐다. 그 교수가 받는 급여 중 일부는 학교에 기여해 연구와 교육에 재투자하면 된다. 첨단 분야 인재를 위한 충분한 보상을 정부와 대학이 다 해줄 수 없으니 기업의 협력을 받자는 것이다.”
―기술주권이 국가경쟁력으로 여겨지는 요즘 산학협력이 가장 필요한데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에 갇혀 있는 건가.
“과거엔 기업이 과제를 주면 학교가 연구를 수행하는 ‘과제수행형’ 산학협력 프로젝트가 많았다. 하지만 이젠 인력이 학교와 기업을 오가는 ‘인력교류형’으로 바꿔 장기간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면 교수는 학교 일과 기업 일을 각각 50%씩 할 수 있도록 한다. 사원은 학교에서 재교육을 받고 반대로 학생은 현장에서 인턴십을 하는 식이다. 이를 통해 기업이 학교에 지원한 돈은 다시 필요 인력 확보와 장비 구입 등에 투입한다. 이렇게 인력 기술 자금이 학교와 기업 사이에서 자유롭게 오가는 ‘새로운 동맹(뉴 얼라이언스)’이 산학협력의 새 모델이 돼야 한다. 학교 입장에선 이런 ‘교육 비즈니스’를 터부시하지 말고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
―교육부는 반도체 분야에서 2031년까지 15만 인재를 양성하겠다고 했다. 현장에서 느끼는 감은 어떤가.
“그동안 정원 늘려 달라고 그토록 요청했는데 이제는 교육부가 먼저 증원 신청을 해보라고 하니 반갑긴 하다. 하지만 아쉬운 건 아직 큰 숫자만 있고 디테일이 없다. 반도체 인력 15만 명이라고 하면 그 안에는 박사급 이상의 최상위 연구자부터 산업현장에서 당장 필요한 인력 등 다양한 레벨의 인력이 존재한다. 어느 레벨의 인력을 어디서, 어떻게 양성할지 구체적인 그림이 있어야 한다. 그게 만들어져야 각 대학이나 기업에 특정한 역할을 맡길 수 있다. 청사진을 던졌으면 빨리 알맹이를 채워야 한다.”
―서울대에도 반도체 관련 교수가 10명 남짓이고 학생 정원 늘리는 것도 쉽지 않다고 들었다.
―지난해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의 이공계 학생들이 의대 진학 등을 위해 자퇴를 한 숫자가 1400명이 넘었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의대 쏠림 현상을 보는 공대의 시각은 어떤가.
“최근 이 문제가 심각해진 건 코로나19의 영향이 있다. 집에 있다 보니 재수를 위해 공부할 여유가 많아졌고 주변의 권유도 이어졌을 것 같다. 의대 쏠림 현상은 의대 학장도 근심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다. 의대에 수학 잘하고 똑똑한 인재들이 몰리는 건 국가 인력 관리 차원에서 낭비가 분명하다. 의사의 높은 연봉과 직업적 안정성이 원인인 건 맞다. 하지만 챗GPT 열풍에서도 확인되듯 인공지능이 본격 도입되면 지금 안정적이라고 여겨지는 분야가 머지않은 미래에 가장 불안한 분야가 될 수 있다. 의사도 그중 하나다. 앞으로 파이가 커지는 건 지금은 불확실한, 그래서 도전 가능성이 더 많은 기술 분야다. 자녀를 의대에 보내려는 학부모들이 예측하는 미래와 실제 미래는 다를 수 있다.”
―인식 개선과 함께 공학기술자들에 대한 사회적 대우나 여건도 달라져야 할 것 같다.
“반도체 기업은 맨날 인재가 오지 않는다고 하는데, 최고의 인재를 원한다면 의사에 버금가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면 된다. 또 창업으로 성공하는 사례도 많아져야 한다. 로버트 랭거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는 전공 분야인 나노기술을 이용해 백신 업체인 모더나를 세웠고, 30개 이상의 회사를 만들었다. 그가 창업한 기업의 가치는 30조 원이 훌쩍 넘는다. 또 창업에 한 번 실패하더라도 다시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면 학생들에게 실패의 두려움이 적어진다. 이런 사례가 확산돼야 자연스럽게 의대 쏠림 현상이 사라질 수 있다. 서울대 교수들도 MEMS(미세전자제어기술)를 이용해 사막에서도 고당도 토마토를 재배하거나, 미생물 진단 및 인공지능을 이용해 패혈증을 빠르게 진단하는 업체를 세워 성공적으로 안착한 사례가 있다.”
―또 이과생들이 통합 수능 여파로 문과에 진학하는 ‘문과 침공’이 사회적 문제로까지 번지고 있다.
“통합수능의 취지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 ‘이과=미적분’이라는 통념부터 없애야 한다. 이과 학생들이 고교 때 배우는 수준을 조금 낮추고, 문과도 수학 과학을 좀 더 하도록 해야 한다. 고교에서 이과 문과 가리지 말고 배울 범위를 정해서 가르치고, 거기서 벗어나는 부분은 대학에서 가르치면 된다. 고교와 대학 커리큘럼을 바꾸는 일이어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입시제도만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인재는 다양해야 한다고 본다. 영재고 과학고 일반고 학생들이 섞이고, 문과 이과도 섞여서 공부해야 시야도 넓어지고 시너지도 난다.”
―챗GPT로 인한 AI 열풍이 불고 있는데 어떻게 평가하나.
“챗GPT가 대단하긴 하지만 그 자체로는 의미 없다. 개별 기술 개발도 중요하지만 이들 기술이 어디서 모여 새로운 시스템 혹은 산업을 창출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4차 산업혁명의 귀결점은 결국 인간이다. 최근 기술 발전이 너무 빠르다 보니 기술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점이 잊혀졌는데 다시 합칠 때가 됐다. 개인적으론 ‘헬스케어 엔지니어링’에 주목한다. 엔지니어링이란 단어를 꼭 쓰고 싶다. 개별 기술이 아니라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다는 의미다. 이를 위해선 공대와 의대는 기본이고, 체육학 식품영양학 약학 등이 함께해야 한다. 개인 맞춤형 헬스케어가 가까운 미래에 가장 유망한 분야라고 본다. 민간자금을 유치해 큰 그림을 그리려고 한다.”
홍유석 서울대 공대 학장은 서울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대우자동차 기술연구소에서 누비라 등 승용차 개발에 힘썼다. 미국 퍼듀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털리도대에서 교수로 일하다 2003년 모교 교수로 돌아왔다. 올해 한국공학한림원 정회원이 됐다.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