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서울 지하철 흉물로 전락한 ‘해피스팟’[메트로 돋보기]

입력 | 2023-02-15 15:11:00


서울은 한국의 수도이자 가장 큰 메트로폴리탄입니다. 서울시청은 그래서 ‘작은 정부’라 불리는데요, 올해 예산만 47조2052억 원을 쓰고 있답니다. 25개 구청도 시민 피부와 맞닿는 정책을 다양하게 펼치고 있습니다. 서울에 살면서 또는 서울을 여행하면서 ‘이런 건 왜 있어야 할까’ ‘시청, 구청이 좀 더 잘할 수 없나’ 하고 고개를 갸우뚱해본 적이 있을까요? 동아일보가 그런 의문을 풀어드리는 ‘메트로 돋보기’ 연재를 시작합니다. 앞으로 매주 한 번씩 사회부 서울시청팀 기자들이 서울에 관한 모든 물음표를 돋보기를 대고 확대해보겠습니다.

서울 지하철 2·5호선 영등포구청역에 설치된 스마트폰 보조 배터리 대여기 ‘해피스팟’의 모습.  철거 예정 안내문에 ‘빨리 철거할 것’ 등의 낙서가 적혀 있다. 2016년 12월 시작된 배터리 대여 사업이 위탁 운영업체의 재정난 때문에 1년 만에 종료되면서 각 지하철역의 대여기가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사지원 기자 4g1@donga.com



‘빨리 철거할 것.’

최근 서울 지하철 2·5호선 영등포구청역에서 이런 낙서가 적힌 기기를 발견했습니다. 높이가 성인 키를 훌쩍 뛰어넘는 육중한 덩치의 기기는 환승 통로 사이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한눈에 봐도 오랜 기간 사용하지 않은 채 방치된 것 같았습니다.

이 기기는 바로 서울교통공사가 2016년 12월 ‘해피스팟’이란 이름으로 도입한 스마트폰 보조배터리 대여기입니다. 대여기는 가로 120㎝, 세로 70.95㎝, 높이 235㎝의 육중한 덩치를 자랑하며 전원이 꺼진 채 서 있었습니다.

시는 민간업체 A 사와 위탁 운영 계약을 맺고 2016년 12월부터 지하철 5~8호선 152개 역사에 해피스팟 157대를 설치했습니다. 최대 3시간까지 배터리를 무료로 빌릴 수 있는 데다 사용 후 원하는 역에 배터리를 반납할 수 있어 시민들의 호응이 높았습니다. “배터리 반납이 제때 안 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회수율도 99%에 달했습니다. 방전돼 가는 스마트폰 배터리를 아끼기 위해 화면 밝기를 ‘최저’로 해본 경험이 한 번이라도 있다면, 해피스팟이 얼마나 가뭄에 단비 같은 서비스였는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해피스팟 이용 절차를 설명하는 안내문. 전용 애플리케이션에 가입한 뒤 인증 절차를 거쳐 신청하면 지하철 역사에 설치된 무인기에서 충전된 보조배터리를 빌릴 수 있다. 최대 3시간까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데다 반납 절차도 간단해 큰 호응을 얻었다. 서울시 제공 

그러나 해피스팟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A 사가 재정난을 이유로 2017년 12월 돌연 서비스를 중단했기 때문입니다. 원래 계약 기간은 2021년 12월까지 5년이었는데, 4년이나 일찍 서비스가 종료된 겁니다.

공사에 따르면 A 사와 나누기로 했던 광고 수익이 예상보다 적었다고 합니다. 업체로선 수익이 적다 보니 운영을 이어가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공사 관계자는 “기계 덩치에 비해 광고판 크기가 작아 단가를 높게 받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스마트폰의 성능이 나날이 발전하면서 배터리 지속 시간이 증가해 보조배터리의 필요성이 적어진 영향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운영이 끝난 지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기 대부분이 철거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공사는 2018년 2월 위탁 운영 계약을 해지한 뒤 A 사에 철거를 요구했지만, A사는 오히려 공사에 정산금 반환 청구 소송을 걸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2020년 9월 법원이 “A 사가 비용을 부담해 대여기를 철거해야 한다”고 판결했지만, 이미 폐업한 업체라 연락이 두절됐다고 합니다. 결국 공사는 법원 판결을 근거로 157대 중 27대만 강제 집행 절차를 밟아 경매에 넘겼고, 세 차례 유찰된 끝에야 공사가 낙찰 받아 철거했습니다.

남은 130대의 기기를 다 철거하려면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전망입니다. 우선 해피스팟이 있는 지역에 따라 강제집행을 관할하는 법원이 달라 일괄 철거가 불가능합니다. 또 연간 1조 원대의 적자를 내고 있는 공사 입장에선 철거 비용도 부담스러운 상황입니다. 공사 관계자는 “개별적으로 소유권 이전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며 “시민들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도록 최대한 빨리 처리하려고 한다”고 전했습니다.

이처럼 철거가 늦어지면서 해피스팟은 이름대로 행복을 주기는커녕 지하철역의 ‘흉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지하철 역사의 미관을 해치는 것은 물론, 시민들의 동선을 방해한다는 지적까지 나옵니다. 특히 출퇴근 시간대 인파가 역사의 좁은 통로로 몰리면 안전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어 서둘러 철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큽니다.

기기에 대한 소유권이 없어 철거가 어렵다는 공사 측의 항변도 충분히 이해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쉽습니다. 서비스를 도입하기 전 수익성을 신중히 예측했다면 사업이 1년 만에 끝나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우리 소유가 아니라 철거할 수 없다”는 공사의 말이 법적으론 맞겠지만, 바쁜 걸음으로 역사를 오가는 시민들에게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사지원 기자 4g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