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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한 물고기, 귀한 물고기[김창일의 갯마을 탐구]〈91〉

입력 | 2023-02-16 03:00:00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해 질 녁 망지기 노인이 동쪽 언덕에 있는 망대에 오릅니다. 바다를 살피다가 멸치 떼가 몰려오면 징을 쳐서 동네 사람들을 모읍니다. 한쪽 벼릿줄은 육지에 묶어놓고, 배에 그물을 싣고 노를 저어요. 멸치 떼를 반원형으로 에워싸며 뭍에 닿으면 기다리던 사람들이 양쪽 벼릿줄을 힘껏 당깁니다. 그물 당기기를 도와준 주민들에게는 멸치를 한 바구니씩 나눠 주고, 나머지는 선주와 선원들 몫으로 챙깁니다. 이렇게 잡은 멸치는 주로 젓갈용으로 팔렸어요.”

며칠 전 부산 다대포후리소리보존회를 방문했을 때 보존회 이사장은 과거의 다대포 멸치잡이를 설명했다. 값싼 멸치를 젓갈로 담근 뒤 판매해 자식들을 키웠다며 옆에서 듣고 있던 노인이 거들었다. 다대포후리소리(부산시 무형문화재 제7호) 가사에도 멸치젓갈의 유용함이 표현돼 있다. 멸치를 잡아서 젓갈을 담가 나라에 상납한 후 부모 봉양하고, 형제와 이웃 간에 나눠 먹고, 논밭까지 살 수 있으니 삼치, 꽁치, 갈치보다 낫다고 했다.

반면 보잘것없는 물고기로 여기기도 했다. 정약전은 자산어보에서 멸치는 젓갈로 만들거나 말려서 각종 양념으로도 사용하는데 선물용으로는 천한 물고기라고 했다. 서유구는 난호어명고에서 모래와 자갈 위에 널어 햇볕에 말려 육지로 파는데 한 줌에 1푼이라고 기록했다.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그물을 한 번 치면 배에 가득 잡히는데 곧바로 말리지 않으면 썩어서 퇴비로 쓰고, 산 것은 탕을 끓이는데 기름기가 많아서 먹기 어렵다. 마른 것은 날마다 반찬으로 삼는데, 명태처럼 온 나라에 두루 넘친다’고 했다.

작고 흔해서 멸치를 가장 중요한 어류로 꼽는 수산학자들이 있다. 멸치 자원량은 연근해 수산생물 잠재생산량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바다에 사는 물고기 중 개체 수가 제일 많은 것이 멸치다. 먹이사슬에서 낮은 위치에 있어 다른 물고기의 먹잇감이 돼 해양생태계에서 핵심 역할을 한다. 우리 선조들도 이런 사실을 얼핏 눈치채고 있었던 듯하다. “수염고래가 멸치를 먹는다고 한다. 내가 예전에 바닷가 어부에게 들으니 멸치 떼가 노는 곳에 수염고래가 다가가 큰 입을 벌리고 멸치 떼를 흡입하면 멸치는 파도가 빨리 치는 줄 착각하고 떼를 지어 수염고래 배 속으로 들어간다고 한다.”(오주연문장전산고 중에서) “동해에서 나는 것은 항상 방어에게 쫓겨 휩쓸려서 오는데 그 형세가 바람이 불어 큰 물결이 이는 듯하다. 바다 사람들은 살펴보고 있다가 방어가 오는 때를 알고는 즉시 큰 그물을 둘러쳐서 잡는데 그물 안이 온통 멸치이다.”(난호어명고 중에서) 수염고래, 방어 등 큰 물고기의 먹잇감이 멸치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명확히 알고 있었다.

멸치는 연중 알을 낳는데 봄, 가을에 집중된다. 성장이 빠르고, 자주 산란하므로 개체 수가 웬만해선 줄지 않는다. 수산학자들의 견해처럼 다른 물고기의 먹잇감이 돼 바다 생태계를 떠받치는 역할을 한다는 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더불어 우리 밥상에서도 멸치는 단연 돋보인다. 액젓, 젓갈, 분말, 육수 등의 형태로 음식 맛을 돋우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맛의 지휘자이며 식탁 위 숨은 주인공이다. 흔해서 소중한 물고기가 멸치다.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