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청년’ 이슬아 작가(상)
“사회변화로 인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에서 기성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말.”
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떠올려보면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 와있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 아닌가요.
헤엄출판사 2층에 있는 작업실에서 사진 촬영에 응한 이슬아 작가. 1층 어디선가 키우는 고양이들 울음 소리가 들려오자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사람 사는 곳이야 거기서 거기라지만, 서울 성북구 정릉동은 왠지 눅진한 운치를 머금었다. 신덕왕후를 모신 정릉(貞陵) 탓일까. 북한산 자락을 흘러내리는 고풍스런 기세. 인근에 유독 사찰이나 점집도 잦다.
그래서일까.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 이슬아 작가(31)의 작업실은, 마주하고서도 한참을 기웃거렸다. 요즘 20, 30대에게 가장 ‘힙한’ 작가의 일터라기에 반짝거림을 떠올렸던 게 괜스레 겸연쩍었다. 직접 운영하는 ‘헤엄출판사’ 간판만 아니었다면, 옛 동무의 고향집 앞에 선 착각마저 들었다.
한데 되짚어보면, 그래서 더 ‘이슬아’답다.
무명작가가 소셜미디어에서 글을 “팔겠다”며 구독자를 모은 충격적 데뷔. ‘일간(日刊) 이슬아’는 기존 문단의 고정관념을 깡그리 무너뜨렸다. 책도 대부분 자신이 차린 출판사에서 펴냈다. 그렇게 학자금 대출을 갚고 자기만의 공간도 마련했다. 뭣보다 그는 쓰고 싶은 글을 쓰며, 먹고 산다. 살짝 시샘을 품은 채 초인종을 눌렀다.
작업실 내부는 바깥 향취와 또 달랐다. 슬쩍 찻잔을 밀어주는 작가 앞에 앉으니 진득한 통유리 햇살이 눈부셨다. 빌 에반스의 달곰한 재즈 피아노 선율을 품은 공간은 담박하지만 빼곡했다. 책과 카메라, 그림들은 있어야할 곳에 맞춤했다. 과한 구석이 없는 그의 문장처럼.
이슬아 작가의 출판사 아래로 이어진 골목길. 1월의 날선 바람이 매섭긴 해도, 구불한 모양새가 적적하면서도 정겹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원래는 기자가 되고 싶었어요. 구체적으로 인터뷰 전문 기자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인터뷰도 하나의 소중한 장르라고 봐요. 데뷔 뒤 인터뷰집도 여러 권 냈는데, 그저 질문을 주고받는 게 아니라 진정성을 갖고 얘기를 나눠야 하잖아요. 글로 옮길 때는 상대의 진의를 제대로 담아 정갈하게 정리해야 하고요. 중고교생 때 근사한 인터뷰 기사를 읽으며 마음을 빼앗기곤 했어요. 신문방송학과(성공회대)에 진학한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작가의 길로 마음을 바꾸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대학을 다니면서 창작에 훨씬 더 관심이 많다는 걸 깨달았죠. 자유로운 글쓰기에 더 흥미를 느꼈다고 할까요. 어느 쪽이건 ‘글쟁이’인 건 마찬가지긴 하고요. 요즘은 글이나 책을 읽지 않는 시대라고 하지만, 저에겐 언제나 글이 제1의 관심사였어요.”
“맞아요, 하하. 그래도, 그냥 언제나 글이 좋았어요. 근데 이쪽 일을 하다보니 이상한 점도 눈에 들어와요. 확실히 책이건 신문이건 읽는 이는 줄어든다는데, 반대로 글을 쓰고자하는 욕망들은 갈수록 커지는 것 같아요. 실제로 신간 출간 종수는 점점 늘어나는 추세고요. 다른 이의 글을 읽진 않는데, 자기 얘긴 쓰고 싶은 이들이 많아지는 건지…. 듣지는 않되 말은 하고 싶은 시대인 걸까요.”
지난해 출간한 이슬아 작가의 첫 번째 소설 ‘가녀장의 시대.’ 출처 교보문고 홈페이지
“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뭔가 읽는 걸 좋아했어요. 지금처럼 스마트폰이나 유튜브가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도 아니고. 책을 보는 게 자연스러운 환경이었어요. 하지만 요즘은 아니죠. 지금도 글쓰기 교사를 병행하고 있는데, 아이들에게 왜 글을 읽어야 하는지 설득하는 게 쉽지 않아요. 사실 어른들도 넷플릭스를 더 선호하는 세상이니까요.”
-대안학교를 다닌 것도 ‘읽고 쓰는 습관’에 도움이 됐을까요.
“그럼요. 실은 부모님이 자식들은 자기들처럼 입시지옥을 겪지 않길 바라셨대요. 그렇다고 유복한 환경은 아니라서 비싼 학교는 아니고…. 당시 살던 경기 남양주에 있는 곳인데, 생태주의 대안학교였어요. 거기선 학생들이 자기 시간표를 스스로 짤 수 있어요. 저로선 책 읽고 글 쓰는 시간을 풍족하게 가질 수 있었죠. 건강하게 몸 많이 쓰며 하고 싶은 걸 모색하는 청소년기를 보내기에 딱 맞는 학교였습니다.”
-청소년 학습 공간 ‘하자센터(서울시립 청소년미래진로센터)’도 다니셨죠.
“네, 열여덟 살부터 스물셋 때까지 다녔어요. 거기 소모임인 ‘어딘글방’에서 글쓰기 훈련을 열심히 받았습니다. 이길보라, 양다솔, 하민아 등 좋은 동료 작가들도 많이 만났어요. 지금도 큰 가르침을 주는 친구들이죠. 실은 거기서 전 가장 글 잘 쓰는 학생이었던 적이 없어요. 문장이 뛰어난 이들을 보며 부러워하는 편이었죠. 하지만 하나 내세울 수 있는 게 있어요. 모임에서 매주 1편씩 글쓰기 과제를 주는데, 한번도 빠진 적이 없습니다. ‘이슬아가 안 썼으면 숙제가 없었던 것’이라 말할 정도였죠.”
-일종의 개근상이네요. 말처럼 쉬운 게 아닐 텐데요.
“가끔 쓰기 싫을 때도 있었죠. 잘 쓴 글만 공개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고요. 하지만 ‘지금보다 더 잘 쓰고 싶다’는 목표의식이 강했어요. 매주 글을 평가받으면 조금씩이라도 분명 나아질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때 글 실력이 부쩍 성장한 거 같아요.”
2018년 이슬아 작가가 소셜미디어에 올린 ‘일간 이슬아’ 광고. 한달 구독료 만 원을 내면 평일 1편씩 수필을 보내주겠다는 당찬 출사표였다. 출처 SNS 이미지
-‘일간 이슬아’를 해낸 끈기가 거기서 비롯됐나 봅니다.
“음…, 영향이 없진 않겠지만, 제가 ‘상인의 딸’이란 점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봅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서울 답십리에 있는 작은 자동차부품 가게를 운영하셨어요. 장사하는 집안에서 자라서, 뭔가에 값을 매기고 그걸 팔아 셈을 치르는 ‘거래’가 낯설지 않았어요. 글쓰기도 기본적으로는 하나의 자영업이라 보거든요. 누군가 읽고 싶은 글을 만들어서 잘 팔아 보겠다는 개념이었죠.”
-2018년 ‘일간 이슬아’는 센세이션을 일으켰어요. 학자금 대출을 갚겠다며 구독자를 모은 발상 자체가 획기적이었습니다.
“학자금 대출 2500만 원 벌기가 목적이었던 건 맞아요. 대학 학비를 대줄 집안 형편은 아니었거든요. 뭣보다 안정된 ‘맛’을 지닌 글을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하며 빠르게 ‘납품’하는 건, 정당한 장사라 믿었어요. 물론 당시 월정액을 내면 글을 보내준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기에 크나 큰 도전이긴 했죠. 기존 작가님들이 보시기엔 천박하다 여길 수도 있고요. 하지만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닌데 부끄럽진 않았습니다.”
-등단 같은 기존 데뷔 방식은 고려하지 않았나요.
“아예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에요. 작가에게 등단은 훌륭한 타이틀이 돼주니까요. 사회생활하면 그런 거 있잖아요. ‘어느 대학 나왔어’ ‘무슨 회사 다녀’하면 자기소개하기 편하거든요. 등단작가란 수식을 달면 여러모로 유리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하지만 워낙 신춘문예 자체가 바늘구멍인데다, 제가 정형화된 제도에서 간택된 기억이 별로 없어서…. 솔직히 붙을 자신이 없었네요, 하하.”
-‘일간 이슬아’로 화제를 모으니 기분이 어땠습니까.
“당연히 기뻤지만, 솔직히 무섭기도 했어요. 구독자 30명 모아서 1명당 만 원씩 한달에 30만 원만 벌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예상보다 일이 커져버렸죠. 근데 이게 돈이 걸린 문제잖아요. 금전이 오고 간 약속은 무조건 지켜야 하는 거니까. 부담감과 책임감이 막중했죠. 이젠 진짜 진검승부구나 싶기도 했고요. 제가 만든 방식이지만, 글이 흥미롭지 않으면 당장 비난이 거셀 테고 구독도 취소할 테니.”
이슬아 각가의 작업실이자 직접 운영하는 ‘헤엄 출판사.’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이슬아식 데뷔’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셈이에요.
“그리 거창한 건 아니고, 얼떨결에 그렇게 된 거죠. 그 시절엔 스스로 천운이 따랐다는 생각도 자주 했습니다. 사람에게 평생 운의 총량이란 게 있다면, 전 ‘일간 이슬아’에 왕창 써버린 거잖아요.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 그다지 행운이 따르지 않아도 당연한 게 아닐까 싶어요. 제가 주식을 안 하는 이유도…, 하하.”
-겸손하게 말했지만, 매일 연재를 아무나 하는 게 아니죠.
“제가 글 쓰는 ‘근육’은 좀 지닌 거 같아요. 대학과 하자센터에서 글쓰기 체력도 잘 길렀고요. 제일 어려운 건 구독자 반응이었죠. 매일 글에 대한 평가가 메일 등으로 거침없이 오거든요. 칭찬도 있지만 비난도 상당했어요. 책을 통해 독자와 만나는 작가라면 겪지 않아도 될 힘겨움이죠. 근데 저도 그렇지만, 구독자들도 그런 경험이 처음이었잖아요. 그래서인지 ‘선’을 지키지 않는 분들도 꽤 있었습니다. 욕설은 둘째 치고, 시궁창 같은 표현들도 서슴지 않았어요.”
-젊은 작가가 감당하기에 충격이 컸겠습니다.
“처음엔 그랬죠. 지금이면 적당히 거리 조절하며 현명하게 넘기련만, 그땐 그 집중포화를 온몸으로 다 받아냈어요. 모든 메일을 다 열어보고 쇼크로 덜덜 떨곤 했어요. 왜 이렇게까지 끔찍한 말을 쏟아 붓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죠. 몸에도 타격이 와서 응급실에 실려 갔던 적도 있어요. 연재 첫 해의 정신적 스트레스는 이루 말로 하기 힘듭니다. 돌이켜보니 잘 버텼다 스스로 칭찬해주고 싶네요. 이후로는 몸도 마음도 너무 상해서, 연재 간격도 늘리고 휴식기도 가지곤 해요.”
-그런데도 지금껏 ‘일간 이슬아’를 유지하는 이유는 뭔가요. 작가로 충분히 입지를 다져서 그런 험한 길은 가지 않아도 되잖아요.
“물론 경제적으로는 학자금 대출도 다 갚았고 책만 내더라도 먹고 살 수 있죠. 하지만 여전히 열심히 쓴 가장 ‘따끈따끈한’ 글을, 일간 이슬아 구독자에게 가장 먼저 보여드리고 싶어요. 그분들이야말로 이슬아가 빚어낸 상품을 가장 사랑해주는 고객이니까요. 게다가 글 쓰는 입장에서 마감은 무척 중요하잖아요? 힘들어도 약속을 지키려고 더 집중하게 되거든요. 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일간 이슬아로 얻는 수익도 꽤 큽니다, 하하.”
[나의 옛날 이야기] ‘요즘 (젊은) 것들’은 연재 글마다 청년들이 직접 고른 옛 사진들을 싣고자 합니다.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며 그 시절을 들춰보는 ‘코너 속의 코너’입니다. 이슬아 작가가 첫 번째로 보내온 사진은, 유치원 시절 책 읽는 모습입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냥 읽는 게 좋았다”는 작가의 말처럼 눈빛이 똘망똘망하네요. 이슬아 작가 제공
(<하>편에서 계속)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