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동 경제부 차장
얼마 전에 한 시중은행 임원을 지내고 퇴임한 A 씨를 만났다. 30년 직장 생활을 찬찬히 회고하던 그는 대뜸 자녀 얘기를 꺼냈다. 아버지를 따라 은행원의 길을 걸을지 아니면 법학전문대학원에 들어가 법조인에 도전할지 고민하다가 후자를 택했다고 했다. 그러자 A 씨는 자신처럼 은행에 들어갔으면 높은 연봉 받으면서 비교적 평탄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아이가 굳이 고생스러운 길을 골랐다며 내심 아쉬워했다고 한다.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은 직업이 가장 좋은 직업”이라는 말이 있다는데 그의 얘길 듣고 보니 여기에 은행도 포함되는구나 싶었다. 예전엔 공기업이나 대학 교직원이 ‘신의 직장’ 계열의 선두 주자였지만 지금은 지방 이전과 임금 정체 때문에 인기가 이전 같지 못하다. 그 자리를 치고 들어온 게 은행이다. 외환위기 기억이 생생한 지금 40, 50대 이상 세대는 당시 정리해고 칼바람을 맞은 은행원을 화이트칼라의 눈물과 애환이 농축된 이미지로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들을 보는 세상의 눈이 다시 달라진 것 같다.
은행이 소위 ‘만고땡’ 직장이라는 세간의 평가에 물론 직원들은 쉽게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주변에 은행 다니는 친구들도 이런 지적을 하면 거품을 문다.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은행들이 창출하는 부가가치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수익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남들이 하지 못하거나 가치 있는 결과물을 내는 쪽이 높은 보상을 받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우리 은행들이 내놓는 상품이나 서비스는 다들 고만고만하고 차별성이 없다. 억대 평균 연봉과 낮은 생산성, 뒤처진 경쟁력과 높은 수익이 기이하게 공존한다.
대통령이 요즘 연일 은행 때리기에 나서고 있지만 사실 ‘열심히 민생을 챙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행보 이상으로 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정부가 할 일은 은행의 팔을 비틀어 대출금리 인하나 기부금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혁신과 경쟁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 즉 시스템을 바로 세우는 일이다. 은행들이 자발적으로 시대착오적인 급여 시스템을 바꾸고 경영 효율화에 나서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라. “공적자금 받아놓고 염치가 없다”며 도덕성을 훈계하거나 사회공헌 액수로 순위를 매기는 것보다는 할 수 있는 일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