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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신 집권’ 꿈꾸는 에르도안, 대지진 책임론에 대선가도 흔들[글로벌 포커스]

입력 | 2023-02-18 03:00:00

‘21세기 술탄’ 에르도안 리더십 타격
2003년 총리 집권 후 개헌 통해… 제왕적 대통령 올라 무소불위 권력
이슬람 원리주의-농촌 지지 기반, 금리인하 압박 등 포퓰리즘 일관
성장률 하락 등 경제난 부추겨… 대지진에 “재난 대비 불가능”




《‘21세기 술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69)이 2003년 집권 후 최대 위기를 맞았다. 6일 튀르키예 남부와 시리아 북부를 강타한 지진으로 헤아릴 수 없는 인명 및 재산 피해가 발생한 가운데 에르도안 정권의 부실 대응은 물론이고 경제난, 반대파 탄압 등 장기 집권 폐해를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다.

오래전부터 사실상 종신 집권을 노리던 그는 지진 전 당초 6월로 예정됐던 대선 1차 투표를 5월 14일로 앞당기겠다고 밝혔다. 이번 대선을 앞두고 6개 야당은 반(反)에르도안의 구심점이 될 단독 후보를 좀처럼 추대하지 못했다. 이에 그는 선거를 앞당겨 야권의 후보 단일화를 방해하고 선거운동 기간 또한 단축하려 했다. 1차 투표에서 손쉽게 과반을 확보해 아예 2차 투표조차 실시하지 않으려는 일종의 ‘꼼수’였다.

하지만 지진으로 수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데다 그가 지진 당일 울부짖는 피해자들 앞에서 “이런 재난에 대비하는 건 불가능하다”며 책임 회피로 일관하자 여론이 악화하고 있다. 에르도안 정권의 무분별한 건축 규제 완화 등이 지진 피해를 키웠다는 비판도 속속 제기되고 있다.

더딘 복구 작업 등을 감안할 때 일각에서는 5월 대선이 정상적으로 열리기 어려우며, 제때 치러지더라도 상당한 혼란이 발생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튀르키예의 정정 불안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미중 패권 갈등, 북한의 거듭된 핵실험 등으로 이미 요동치는 국제 정세를 더 큰 격랑에 빠뜨릴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 지진으로 흥하고 지진으로 위기

에르도안은 1954년 북서부 리제의 저소득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 최대 도시 이스탄불로 이주했고 한때 길거리에서 사탕, 생수, 빵 등을 팔았다. 젊은 시절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에서 활동한 후 정계에 입문했다. 1994∼1998년 이스탄불 시장을 지냈다. 1999년 세속주의 국가에서 과도한 이슬람 사상으로 대중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4개월 복역한 경력도 있다.

1999년 이스탄불과 가까운 서부 해안 도시 이즈미르에서 대지진이 발생해 최소 1만7000명이 숨졌다. 에르도안은 이때 뷜렌트 에제비트 당시 총리의 부실 대응, 부패 등을 질타하며 유력 정치인으로 떠올랐다고 미 외교매체 포린폴리시(FP)가 진단했다. 이를 통해 전국적 인지도를 얻었고 2001년 현 집권당인 정의개발당을 창당했다.

에르도안은 2003년 내각책임제 국가였던 튀르키예의 총리에 올랐다. 당시 3146억 달러(약 409조 원)였던 국내총생산(GDP)을 2013년 9578억 달러(약 1245조 원)로 세 배로 늘렸다. 고성장을 바탕으로 초대 대통령 케말 파샤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다. 미국 등 서방 또한 이때는 그를 ‘이슬람 문화와 시장 경제를 융합한 지도자’로 호평했다.

그는 2011년 3선 총리가 됐다. 당 대표의 4선을 금지한 정의개발당 당규로 추가 집권이 가로막히자 당시 의회가 선출했으며 원로급 정치인의 명예직 정도로 여겨졌던 대통령에 도전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대통령 선출 과정을 직선제로 바꿨고, 2014년 5년 임기의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3선 총리 시절부터 히잡 착용, 공공장소에서의 애정 표현 금지, 주류 판매 규제 등 강력한 이슬람 원리주의 정책을 폈다. “여성과 남성은 평등하지 않다” “여자라면 아이 셋은 낳아야 한다” 등 시대착오적인 발언도 일삼았다. 이에 서구 문물에 익숙해진 도시 엘리트, 건국 당시 케말을 도와 정교분리와 세속주의를 주도한 군부와의 갈등이 커졌다.

2016년 에르도안을 몰아내기 위한 쿠데타가 발생했지만 몇몇 군인만으로는 이미 장기 집권 기반을 다진 그와 대적할 수 없었다. 그는 사회 안정을 명목으로 의회 해산권, 국가 비상사태 선포권, 장관 단독 임면권 등을 보유하며 무소불위 권력을 행사했다. 사회 곳곳의 반대파, 쿠르드족 등 소수민족도 잔혹하게 탄압했다. 2017년에는 국민투표를 통해 내각책임제를 폐지하고 아예 대통령중심제로 개헌했다. 이를 통해 2018년 대통령제하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확고한 1인 지배 체제를 굳힌 것이다.

사실상의 ‘셀프 개헌’ 당시 그는 중임을 가능하도록 했을 뿐 아니라 중임 대통령이 임기 중 조기 선거를 시행해 당선되면 추가로 5년을 더 재임할 수 있도록 했다. 즉, 2018년 대통령으로 뽑힌 에르도안이 올해 중임에 성공하고 임기 종료 직전인 2028년 조기 선거를 시행해 다시 뽑히면 79세인 2033년까지 집권할 수 있다.

에르도안은 반대파 탄압, 장기 집권 시도 등을 비판하는 서방 주요국과도 사사건건 충돌했다.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에게는 독일 사회가 금기로 여기는 ‘나치’ 등을 들먹였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에게는 “뇌사 상태 아니냐”고 막말을 퍼부었다. 이런 그를 두고 오스만튀르크 제국을 통치하던 술탄 못지않은 현대판 전제 군주라는 비판이 잇따랐다. 그의 별명이 ‘21세기 술탄’인 이유다.

● 최악 대지진, 고조되는 책임론

에르도안의 지지 기반은 농촌,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 이번 지진의 주요 피해 지역인 남부, 경제적으로 낙후된 동부 산악지대 등이다. 이는 튀르키예의 근현대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오스만튀르크는 1453년 동로마를 멸망시킨 후 약 500년간 중동, 중유럽, 북아프리카에 걸친 제국을 건설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 편에 섰다 영토 대부분을 잃자 케말을 포함한 청년 장교들이 쿠데타로 만든 공화제 국가가 오늘날의 튀르키예다.

케말은 오스만의 영광을 재현하려면 강력한 서구화가 필요하다고 봤다. 히잡 금지, 여성참정권 부여, 라틴알파벳 사용 등을 속속 도입했다. 케말 사후 그의 정교 분리 노선을 계승한 군부는 세속주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이슬람 원리주의자와 대립했다.

문제는 세속주의로 양극화가 심해졌다는 데 있다. 자본가, 대도시 엘리트, 서부는 근대화 혜택을 누렸지만 저소득층과 남동부는 소외됐다. 이에 그는 저소득층을 위해 생필품인 빵과 차 가격은 생산 원가 이하로 낮추도록 압박했다. 반면 자동차, 고급 가전제품 등 사치품에는 높은 세율을 부과하는 식으로 전형적인 대중영합(포퓰리즘) 정책을 폈다.

건설 규제도 대폭 완화했다. 1999년 이즈미르 대지진 후 당시 정권은 내진 대비 규정을 강화했다. 에르도안은 2018년 5월 규제를 지키지 않은 건축물이라도 소정의 벌금만 내면 다시 건축 허가를 내주는 ‘사면 정책’을 실시했다. 한 달 후 치러지는 대선을 위한 표심 잡기용이란 분석이 제기됐다.

실제 이번 지진으로 피해를 본 10개 주에서만 10만 건 이상의 사면이 승인됐다. 에르도안 정권은 사면 정책 도입 후 1년 반 동안 740만 건의 신규 건축도 허가했다.

1999년 대지진 이후 당국이 지진 피해 예방을 위해 거둬들인 소위 ‘지진세’ 용처를 놓고도 비판이 커지고 있다. AFP통신에 따르면 튀르키예 정부는 그간 지진세로만 총 880억 리라(약 6조 원)를 걷었다. BBC는 에르도안 정권이 이 지진세를 어디에, 어떻게 사용했는지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에르도안이 쿠데타 이후 자신에게 반기를 든 군의 역할을 대폭 축소하는 바람에 이번 지진 후 구조 및 복구 작업이 더뎌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지진 현장에서 군의 역할을 대신하는 ‘튀르키예 재난관리국(AFAD)’에는 재난 대처 경험이 적고 대통령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인물만 가득하다고 지적했다.

● 리라 급락-고물가 등 경제난도 심각

에르도안 정권의 부실한 경제 성적표 또한 민심 이반을 가속화하고 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03∼2012년 10년간 튀르키예 경제의 연평균 성장률은 5.7%였다. 그가 부적절한 경제 정책을 남발하면서 장기 집권 시도를 본격화하자 성장률이 하락해 2019년에는 0.8%로 뚝 떨어졌다. 2013년 9578억 달러였던 GDP 또한 2021년 8190억 달러(약 1065조 원)로 떨어졌다. 사실상 10여 년간 경제가 후퇴한 것이다.

고물가, 리라 하락 등도 심각하다. 지난해 10월 기준 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기 대비 무려 85.5%로 25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다. 이 와중에 경제 원리를 도외시한 그의 통화 정책이 물가 상승과 화폐 가치 하락을 부추기는 악순환이 나타나고 있다.

에르도안은 집권 내내 “고금리가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며 중앙은행에 기준금리 인하를 압박했다. 자신의 지지 기반인 저소득층과 농민이 기준금리 인상에 취약하다는 점을 우려해 포퓰리즘 정책을 편 것이다. 기준금리를 올리면 시중 통화량이 줄어 물가가 내리고 통화 가치가 오른다는 현대 경제학의 정설 따윈 안중에도 없다.

중앙은행 총재 또한 밥 먹듯 갈아 치웠다. 그는 집권 후 총 6명의 중앙은행 수장을 임명했다. 그의 금리인하 요구에 미온적으로 대처하다 내쳐진 무라트 우이살 전 총재, 나지 아으발 전 총재의 임기는 각각 16개월, 4개월에 불과했다. 2021년 3월 취임한 샤하프 카브지오을루 총재가 언제까지 자리를 지킬지도 알 수 없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은 채 권력자가 좌우하는 통화 정책과 금융 체계를 신뢰할 수 없으니 해외 자본이 떠난다. 이로 인해 리라 가치가 더 떨어지고 수입 물가 또한 상승해 인플레이션 압력 역시 덩달아 높아진다.

BBC에 따르면 지난해 5월 kg당 8∼10리라였던 토마토 가격은 지진 전날인 5일 기준 25리라까지 올랐다. 지진으로 인한 물자 부족, 물류 대란을 감안하면 각종 식자재와 생필품 가격 또한 더 오를 것이 확실시된다.

● “재집권 가능” vs “예전과 달라”

이런 상황에서 그는 대선에서 다시 승리할 수 있을까. 전망은 엇갈린다. “변변한 야권 주자가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지진으로 인한 민심 악화에도 그가 승리할 것”이란 주장과 “과거와는 다르다”는 의견이 맞선다.

포린폴리시에 따르면 이번 지진 피해 지역 10개 주 중 아디야만 등 6개 주는 2018년 대선 당시 에르도안에게 70% 이상의 지지율로 몰표를 안긴 지역이다. 이 지역 주민들이 정부의 지진 대응을 비판할 순 있어도 야권 후보를 지지할 가능성은 낮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반면 영국 컨설팅업체 ‘베리스크 메이플크로프트’의 앤서니 스키너 중동부문 국장은 13일 AFP통신에 “끔찍한 재난으로 대중의 분노가 새로운 화약을 공급받았다”고 진단했다. 에르도안 정권에 대한 분노가 과거와 다른 차원이라는 의미다.

제1야당 공화인민당의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는 이번 지진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오직 에르도안이라며 “20년이나 집권하면서 지진에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5년 전 대선에 도전했던 집권인민당의 무하렘 인제 대표 또한 지진 피해를 본 카라만마라슈를 방문해 “군대, 경찰, 수프, 담요, 국가가 없다. 아무것도 없다”고 비판했다. 결국 에르도안 정권의 복구 작업 속도, 야권이 단일 대선후보를 얼마나 빨리 선출할 수 있느냐 등이 5월 튀르키예 대선 향방을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이청아 기자 clearlee@donga.com
이채완 기자 chaewa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