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잠든 사이, 오늘 밤에도 세상은 빙글빙글 돌아갑니다. 지난밤 당신이 놓쳤을 수도 있는 세계 각국 소식, ‘세계 한 조각’이 쉽고 재미있게 전달합니다. 순식간에 바뀌는 세상만사, “잠깐! 왜 이러는 거지?” 여러분 궁금증을 해결해 드리겠습니다.《24일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한 지 1년째 되는 날입니다. 지난 1년 동안 우크라이나인들이 자국 영토에서 러시아를 상대로 혈전을 벌일 때 이곳 한국에서도 우크라이나 평화를 위해 싸운 ‘전장 밖 전사들’이 있습니다. 재한 우크라이나인들입니다. 동아일보는 지난달부터 약 한 달간 한국에 거주하는 우크라이나인 9명을 인터뷰했습니다. 러시아 규탄 시위와 전시회, 고국 지원 모금을 위한 콘서트 및 각종 활동을 통해 평화를 외쳐온 이들은 “조국을 위해선 뭐든 할 준비가 돼 있다”고 결연하게 말했습니다. 이들이 1년간 펼친 ‘평화 투쟁기’를 소개합니다.》
지난달 29일 서울 중구 주한 러시아대사관 앞에서 재한 우크라이나인들과 한국인들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지난해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래 재한 우크라이나인들은 시위, 모금, 공연 등 다양한 방식으로 평화를 외치고 있다. 원대연기자 yeon72@donga.com
“안나, 전쟁이 터졌어. 러시아가 공격하고 있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인 지난해 2월 말 우크라이나-폴란드 국경 인근에 우크라이나 피란민이 몰려 있다. 안나 보크란 씨 제공.
3월 2일, 우여곡절 끝에 그를 태운 한국행 비행기가 폴란드에서 출발했다. 이제 유학생이자 동시에 피란민이다. 눈을 감으니 그가 타고 있던 차 바로 위를 날아 간 러시아군 미사일, 포격을 받아 산산조각난 건물 등이 자동 재생됐다. ‘살았다’는 안도감 위로 더 무겁게 쏟아지는 잠에 들기 직전까지 끊임없이 되뇌었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 할까’.
우크라이나에 보낼 거즈를 들고 있는 류드밀라 페트렌코 씨. 류드밀라 페트렌코 씨 제공.
그가 오스트리아 공항에 도착하면 가방을 받기 위해 또 다른 우크라이나 친구가 기다리고 있을 예정이다. 이 친구는 현지에서 우크라이나로 돌아가는 사람을 찾아 가방을 쥐어 줄 것이다. 페트렌코 씨의 ‘우크라이나 배송 작전’은 말 그대로 손에 손을 거쳐 이뤄졌다.
지난해 4월 “우크라이나에 의약품이 부족하다”며 온라인에 올라온 글을 보고 시작한 의약품 배송이 어느새 10회를 넘겼다. 지인의 지인에게까지 물어 물어 유럽에 가는 사람을 찾고, 현지에서 가방을 받아줄 우크라이나 난민 ‘배달원’을 구했다. 배달 작전 경유지는 이제 폴란드 독일 루마니아를 비롯해 유럽 8개국으로까지 늘어났다. 그는 “매순간이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서 열린 세계문화축제에서 류트밀라 페트렌코 씨(왼쪽)와 율리아 곤차렌코 씨가 우크라이나에서 가져온 도자기 등을 판매하고 있다. 류트밀라 페트렌코 씨 제공.
류트밀라 페트렌코 씨가 보낸 의약품을 받은 우크라이나 병사들이 고마움을 표시하는 사진을 찍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다. 류트밀라 페트렌코 씨 제공.
2017년 한국에 와서 일러스트레이터로 근무한 율리아 곤차렌코 씨(30)는 담담하게 지인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학교 같은 반이던 소년은 전쟁이 터진 직후인 지난해 3월 바로 군대에 자원 입대했다가 최전선에서 전사했다. 곤차렌코 씨는 지난 1년간 서울 중구 주한 러시아대사관 앞에서 열린 반전 시위와 각종 모금 활동에 빠지지 않았다. 조국을 위해 싸우다 영원히 ‘20대’에 남은 친구들을 기리기 위해서다.
지난헤 6월 인천 미추홀구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평화 기원’ 전시회에서 율리아 곤차렌코 씨가 자신의 작품을 활용한 전시회 포스터 앞에 서 있다. 율리아 곤차렌코 씨 제공.
“주변에서 평온하게 인생을 보내는 (다른 나라) 사람들을 보며 몸에 ‘큰 구멍’이 뚫린 기분이었어요. ‘왜 내 조국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자가 만난 우크라이나인들은 모두 “싸우기 위해 울 시간조차 없다”고 했다. 작든 크든 각자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우크라이나 드니프로에서 온 마리야 콜레스닉 씨(29)는 전쟁 발발 직후 친구 카트리나와 같이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에 달려가 한국어 번역과 물품 정리를 도왔다. 러시아군이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정황이 드러난 도시 부차에서 지난해 2월 탈출한 마리야 티모센코 씨는 태어나 처음으로 시위라는 것에 참가해 ‘나는 우크라이나인’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폴란드 난민 캠프에 있을 때 매일 울면서 부른 노래”라고 소개한 그는 “노래할 수 있으면 노래하고, 말할 수 있으면 말하는 것이 우리가 우크라이나를 지키는 방식”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10월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서 열린 세계문화축제 결선 장면. 우크라이나 전통 복장을 입은 율리아 스테파넷 씨(왼쪽에서 네 번째)와 우크라이나인들이 우크라이나 국가를 부르고 있다. 이고르 씨 제공.
첫 출전한 우크라이나팀은 우크라이나 전통 민요와 춤으로 구성된 무대를 선보이며 3위를 차지했다. 무대에서 건반을 맡은 고려인 출신 우크라이나인 줄리아 전 씨(30)는 “전쟁은 우리 스스로 우크라이나 정체성을 찾아가는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서 열린 세계문화축제 결선에서 우크라이나 전통 복장을 입은 율리아 주크 씨(오른쪽)가 무대에 오르고 있다. 이고르 씨 제공.
한국에 있는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가 조국을 침공한 이후 더 이상 러시아어를 쓰지 않고 오직 우크라이나어로만 이야기한다고 전했다.(우크라이나는 지역별로 러시아어를 쓰는 인구 비율이 90%까지 올라간다) 주크 씨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하나’라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주장은 틀렸다”며 “우리 고유의 정체성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난달 29일 서울 중구 주한 러시아대사관 앞에서 열린 반전 시위에서 한 우크라이나 여성이 “우크라이나를 당장 무장시키자(Arm Ukraine Now)”고 적힌 포스터를 들고 있다. 원대연기자 yeon72@donga.com
현직 심리 상담가인 티모센코 씨는 우크라이나인이 집단 트라우마(common trauma)를 겪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유 없는 침공으로 한평생 살던 고향을 뒤로 한 채 낯설고 열악한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이들은 공황에 빠질 수밖에 없다”며 “그러나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도 이미 적응하고 있다”고 했다.
우크라이나에 있는 가족들과 연락이 되지 않을 때, 지인의 부상 소식을 들을 때, 집 근처에 공격이 시작됐다는 공습경보를 확인할 때 재한 우크라이나인들은 침착하다.
“이제는 고국 공습 소식을 들어도 더 이상 울지 않습니다” 보크란 씨가 인터뷰 말미에 말했다. “그렇다고 전쟁이 익숙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눈물이 나오지 않을 뿐이에요.”
김수현기자 news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