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경기 출장 기록 달성 후 헹가래를 받고 있는 여오현. 한국배구연맹(KOVO)제공
“난 꿈이 잊었죠.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내 가슴 깊숙이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
여전히 175㎝에서 더 자라지 않던 홍익대 2학년 때였다. 국제배구연맹(FIVB)에서 수비 전문 포지션 ‘리베로’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2000년 삼성화재에 입단한 여오현은 2005년 프로배구 출범과 함께 프로 선수가 됐다.
여오현은 “사실 처음에는 서운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무리 어렵게 공을 받아도 공격하는 에이스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물론 이제는 좋은 수비 덕에 흐름을 바뀐다는 걸 팬들도 알고 다들 잘 알고 계신다”고 말했다.
프로 출범 후 삼성화재에서 282경기를 소화한 여오현은 2013~2014시즌을 앞두고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어 현대캐피탈로 둥지를 옮긴 뒤 팀에 ‘2013 안산 우리카드컵’ 대회 우승 트로피를 안겼다.
현대캐피탈은 그해 V리그에서 4년 만에 챔피언결정전 무대를 밟았고 여오현은 그다음 시즌 ‘연봉 킹’(3억5000만 원) 자리에 올랐다.
삼성화재 시절부터 동료 선수로 함께 뛴 최태웅 현대캐피탈 감독은 2016~2017시즌을 앞두고 여오현에게 탄수화물을 적게 먹고 필라테스를 시작하라고 주문했다.
2015~2016시즌부터 플레잉 코치로 뛰기 시작한 여오현이 45세까지 현역 생활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돕겠다는 소위 ‘45세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한 팀 감독은 “여오현이 45세까지 뛴다면 ‘생큐’라고 외치는 상대 팀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리베로의 교과서’로 통하는 여오현이라고 해도 45세가 되면 B급으로 기량이 내려올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이 부문 2위 오은렬(26·대한항공)이 43.9%, 3위 전광인(32·현대캐피탈)이 41.98%인 것과 비교하면 ‘압도적’이라고 할 수 있다.
“늘 걱정하듯 말하죠. 헛된 꿈은 독이라고. 세상은 끝이 정해진 책처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라고.”
위기가 없었던 건 아니다. 팀이 리빌딩에 들어가면서 2019~2020시즌에도 127세트를 소화했던 여오현은 2020~2021시즌에는 63세트, 2021~2022시즌에는 58세트 출전에 그쳤다.
제아무리 명기(名器)라도 연주자가 방치하면 녹이 슬어 둔한 소리를 내게 마련이다.
그 사이 여오현을 대신해 현대캐피탈 후위를 지킨 박경민(24)은 누구보다 믿음직한 소리를 내는 리베로로 성장했다.
박경민은 지난 시즌 서브 리시브 효율 51.8%를 기록했다. 리그 평균 기록(32.4%)보다 159.7% 높은 기록이었다.
여오현도 리그 평균보다 이렇게 높은 기록을 남긴 적은 없다.
박경민은 세트당 디그에서도 2.7개로 1위에 이름을 올렸다. 냉정하게 말해 현대캐피탈은 여오현이 없어도 되는 팀이 된 것이다.
“그래요, 난,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저 차갑게 서 있는 운명이란 벽 앞에 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
실제로 지난 시즌이 끝난 뒤 사석에서 만난 현대캐피탈 관계자는 “다음(2022~2023) 시즌 개막전이 여 코치 은퇴 경기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비시즌 기간 치른 연습 경기에서 박경민이 흔들리자 최 감독은 개막전부터 여오현에게 서브 리시브를 맡겼다.
여오현은 3라운드 때까지도 박경민보다 상대 서브를 더 많았다. 4라운드부터 박경민에게 점점 자리를 내주더니 5라운드 들어서는 거의 코트를 밟지 못했다.
최 감독은 “박경민이 컨디션이 정말 좋아서 (여오현으로) 교체할 틈이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맞다. 감독은 팀에 승리를 가져다줄 선수를 기용해야 한다.
“언젠가 나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순 없죠. 내 삶의 끝에서 나 웃을 그날을 함께해요.”
18일 의정부 방문경기를 건너뛴 여오현은 21일 천안 유관순체육관에서 남자부 안방 경기 1세트 시작과 함께 코트를 밟았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남녀부를 통틀어 V리그 무대를 한 번이라도 밟은 938명 가운데 처음으로 600경기 출전 기록을 남기게 됐다.
여오현이 600경기를 치르는 동안 그가 속한 팀은 413승(187패)을 기록했다. 이 역시 리그 개인 최다승 기록이다.
또 여오현(9회)보다 리그 우승 트로피를 많이 차지한 선수도 없다.
요컨대 누군가 ‘프로배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가 누구인가?’라고 물으면 여오현이라는 세 글자가 정답에 가장 가깝다.
여오현은 수비만 하는 선수인데 말이 되느냐고? 공격만 하는 선수가 최고인 건 괜찮고?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