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미국 미리엄 웹스터 사전이 뽑은 ‘올해의 단어’가 가스라이팅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미국을 가스라이팅했다(선거사기라는 가짜뉴스를 퍼뜨렸다)”는 식으로 정치, 미디어에서 주로 쓰이면서 검색량이 전년도에 비해 17배나 폭증해서다.
가스라이팅이란 말이 1938년 초연된 연극 ‘가스등’(1944년 영화로도 나왔다)에서 나왔다는 건 많이 알려져 있다. 본래 의미는 ‘오랜 심리적 조작으로 피해자의 판단력을 잃게 함으로써 가해자한테 의존하게 만드는 행위’지만 요즘 미국 정치판에선 사적 이익을 위한 거짓말, 대(對)국민 사기를 심플하게 가스라이팅이라고 한다. 오죽하면 트럼프가 쏟아낸 가짜뉴스를 모아 ‘가스라이팅 아메리카’라는 책까지 나왔겠나.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가짜 주장을 모아 정리한 책 ‘가스라이팅 아메리카’ 표지.
● 트럼프와 이재명은 닮은 꼴 희생양?
“법치를 빙자한, 법치의 탈을 쓴 사법사냥이 일상이 돼 가고 있는 폭력의 시대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자신의 체포동의안 국회 본회의 표결을 앞둔 23일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윤석열 정부를 비난했다. 사법사냥의 희생물은 즉 이재명 자신이라는 소리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대장동·위례신도시 개발비리 연루 혐의와 관련해 2023년 2월 10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으로 2차 출석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 민주당 제보자 “대장동 몸통은 이재명”
하지만 이재명이 잘못 알고 있는 게 있다. 윤석열 정부가 이재명의 범죄(혐의)를 잡아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재명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사적 이익을 위해, 정적 제거를 위해, 권력 강화를 위해 남용한다”며 윤 대통령을 공격했지만 그의 죄를 처음 폭로한 쪽은 이재명과 같은 민주당 안에 있었다. 대선 경선 때 이낙연 캠프다. 2021년 8월 말 대장동 비리 의혹을 첫 보도한 박종명 경기경제신문 기자는 대선 직전인 2022년 3월 8일 페이스북에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의 핵심 관계자가 제보를 해줬기에 사실 확인을 거쳐 기사를 썼다”는 글을 올렸다(이재명 성남시장의 전횡으로 엄청난 손해를 본 대장동 원주민들이 이낙연 선거 캠프에 문건을 들고 와 읍소하더라고 최근 중앙일보에도 소개됐다).
● “의원선거 떨어지면 생명 끝장, 끽”
무죄 추정 원칙에 따라 이재명의 죄가 ‘없다’고 치자. 그렇다면 왜 그는 오종종하게 대선 패배 후 인천 계양을 보궐선거에 나섰던가. 5월 23일 지역구 유세 중 이재명이 제 손으로 제 목 치는 시늉까지 해가며 “이번에 이재명 지면 정치생명 끝장난다. 진짜요. 끽” 했던 영상이 엄연히 존재한다. 의원 불체포특권 없이는 성남시장 시절 자행한 범죄(혐의)에 대해 보호받지 못하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일 터다. 2022년 5월 23일 국회의원보궐선거 유세 중 손으로 자신의 목을 긋는 행동을 하는 이재명 당시 인천계양을 후보. 인터넷 커뮤니티 캡처
● 가스라이팅에 넘어가는 사람들은 또 뭔가
더욱 놀라운 건 이재명의 가스라이팅, 즉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을 토하는 데 똑똑한 의원들도, 극성맞은 개딸들도 잘도 넘어간다는 것이다. 대선 때 이재명은 “존경하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라고 말하니 진짜 존경하는 줄 아는데 전혀 아니다”고 스스로 밝혔던 적도 있다. 정치인으로서 가장 중하게 여겨야 할 신뢰 자본은 약에 쓰려고 해도 못찾을 정치인이 이재명일성 싶다. 그가 27일 체포동의안을 부결시키기 위해 비명계 의원들까지 면담하며 “공천은 걱정하지 마시라”고 은근한듯 표 단속을 했단다. 음하하, 아직도 이재명의 약속을 믿는 의원들이 계셨다는 거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2023년 2월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 앞에서 소속 의원들과 검찰독재 규탄대회를 열고 있다. 규탄대회에는 소속 의원과 당원 3000명(주최 측 추산)이 참석했다고 민주당은 밝혔다. 앞줄 왼쪽부터 서영교 정청래 의원, 이 대표, 박홍근 원내대표, 고민정 박찬대 의원.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 민주당이 이재명 개인정당이냐
자신 있게 틀린 답을 말한 오답자들은 정답을 답한 사람들(정답자)처럼 정치에 관심도 많고 투표 참여율도 높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정치적 태도와 행태에서 오답자들은 민주당을 선호했고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에 투표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깊은 침묵…). 그 오답자들이 지금도 이재명을 지지한다고 추정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그래서 우리나라가 잘 되려면, 정확한 정보를 잘 갖춘 시민(교육/정신)이 중요하다고 학교 다닐 때 마르고 닳도록 배웠다. 그래서 이재명에게 당부하고 싶다. 정녕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다면, 23일 국민 앞에 쏟아냈던 궤변을 판사 앞에서 당당히 반복함으로써 구속영장 기각을 받아내주기 바란다. 그리고 재판에서도 무죄를 입증해야 할 것이다.
그럴 자신 없다면, 제발 그 세치 혓바닥 대(對)국민 가스라이팅을 멈추시라. 설령 성남시장 때 시정농단을 하지 않았다 해도, 민주당은 이재명 사당(私黨)이 아니다. 의원들 시간과 에너지를 당 대표 멋대로 징발해 개인 방어에 쓴다는 건 혈세 도둑질이다.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