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텍사스주에 충전기 공장을 짓고 있는 국내업체 SK 시그넷의 충전기 모습. SK 시그넷 제공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를 뜻하는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 전략이 한국 산업계를 점점 더 강하게 죄어 오고 있다.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중국 내 생산을 제한할 수 있다는 미 정부 관계자의 한마디에 반도체 업계는 불확실성이 더 커졌다. 배터리 업계에선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의 세부 가이드라인 발표를 한 달 앞두고 ‘충전기 버전의 IRA’까지 등장했다. 기업들 사이에선 “미국이 한국의 주력 성장 산업인 반도체와 배터리를 양손에 쥐고 흔들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26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조 바이든 행정부가 이달 15일(현지 시간) 발표한 ‘바이 아메리카(Buy America)’ 법안 세부규정으로 국내 기업들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정부가 약 10조 원을 투입해 미 전역에 전기자동차 충전소 50만 대를 짓기로 한 이 법안은 2021년 통과됐다. 그런데 세부규정에서 충전기 보조금을 받으려면 미국산 철강을 쓰고, 미국에서 최종 조립을 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특히 내년 7월부터는 부품의 55% 이상을 미국에서 제조해야 한다. 미국 내 생산은 물론 자재와 부품까지 현지 조달을 강제한 셈이다.
미국 수출을 겨냥하고 있던 국내 제조업체들은 갑작스럽게 현지 공장 설립을 고민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미국 현지 생산을 준비했던 기업들도 미국산 자재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충전기 업체 A사 관계자는 “미국산 자재가 질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을뿐더러, 이제 와서 급하게 공급선을 뚫으려면 현지 업체들보다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에 계약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번 충전기 관련 세부규정의 경우도 업계 의견 수렴 절차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최종안에 대부분 반영되지 않았고, 오히려 혼선만 확대됐다는 게 업계 얘기다. 당초 안에서 미국산 부품 비중 기준은 ‘올해까지 25%, 내년 1월부터 55%’ 였다. 최종안은 ‘내년 7월부터 55%’로 적용 시점을 겨우 6개월 유예했는데, 원래는 없었던 ‘미국산 철강’이 갑자기 끼어 들어갔다. 충전기 업체 B사 관계자는 “결과적으로 미국에 무조건 공장을 두라는 입장 역시 변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반도체 업계를 들썩이게 한 앨런 에스테베스 미국 상무부 산업안보 담당 차관의 발언도 같은 모양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업체들에 제공한 대중(對中) 반도체 수출 통제 1년 유예가 올 10월 종료되면 어떻게 되냐는 질문에 “반도체 수준에 한도를 둘 가능성이 크다”고만 언급했을 뿐 구체적인 방향은 기업들과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삼성과 SK의 입장에선 당장 올 하반기(7~12월) 이후 대중 투자는 물론이고 글로벌 생산 전략에 큰 변수가 생긴 것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동맹 기업들에 피해를 주지 않겠다지만 결국 우리 기업들은 물밑 협상에 시간과 역량을 쏟아야 한다”면서 “어떤 결론이 날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불확실성도 큰 리스크”라고 말했다.
국내 자동차·배터리업계는 3월 말로 예정된 IRA 세부 규정 발표를 한 달여 남겨 두고 미국 정부의 입만 쳐다보고 있다. 리튬, 코발트 등 중국산 배터리 소재 의존도가 높은 한국 업계는 ‘우려집단(Foreign Entity of Concern)’에 대한 정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미국 정부의 가장 최근 가이드라인인 지난해 12월 IRA 백서에서도 이는 명확히 규정되지 않았다.
IRA에는 “미국의 우려집단으로부터 부품이나 핵심광물을 조달받을 경우 세액공제에서 제외된다”고만 명시돼 있다. 12월 백서에서도 이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는 나오지 않았다. 우려집단의 대표로 거론되는 곳은 중국이지만 현실적으로 중국을 공급망에서 원천 배제하고 배터리, 전기차를 생산하는 건 가까운 시일 내 불가능하다. 황경인 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미 재무부가 IRA 백서를 통해 핵심광물 인정범위 완화 가능성을 내비친 것을 감안할 때, 우려집단 관련 요건도 세부규정을 지켜보며 종합적인 판단을 내릴 필요가 있다”며 “백서에서도 주요 조항에 ‘may(할 수도 있다)’라고 표현돼 있는 만큼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 배터리 업계의 좌절감과 혼선은 이달 13일 중국 배터리 업체인 CATL과 포드의 미국 미시간주 배터리 생산라인 설립 계획 발표로 더욱 커져 있다. 정작 미국의 ‘안방’ 시장에 중국 배터리 업체의 진출을 사실상 눈감아 준 셈이기 때문이다. CATL은 기술 라이선스만 제공하고 생산은 미국 현지에서 포드가 하는 방식으로 IRA를 우회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미국은 결국 중국을 배터리 공급망에서 제외하겠다는 IRA의 근본 방향성을 훼손해가면서까지 자국 내 일자리와 생산설비 유치를 택한 것”이라며 “이렇게 되면 국내 기업들 입장에선 앞으로 아메리카 퍼스트를 앞세워 나올 많은 정책들의 향방을 예측하기가 더 어려워진다는 의미”라고 말했다._
곽도영기자 now@donga.com
박현익기자 bee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