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과잉생산 부추길 양곡관리법 개정안 오늘 본회의서 巨野 일방 강행처리 가능성 ‘재정 블랙홀’ 쌀 편중 더 심화시켜 가뜩이나 취약한 ‘식량안보’ 더 후퇴시킬 것
천광암 논설주간
한국은 2005년부터 매년 햅쌀 수천억∼1조 원어치를 사들여 창고에 쌓아 두는 ‘공공비축제’를 시행하고 있다. 또 이와 별개로 쌀값이 떨어지면 정부가 나서서 과잉 생산된 물량을 사들이는 ‘시장격리제’도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9월 중순까지만 해도 10여 차례나 시장격리를 단행했고, 거기에 들어간 돈만 5조 원이 넘는다. 비축·격리로 창고에 재어둔 쌀은 3년쯤 뒤 매입·보관비용의 10분의 1이 조금 넘는 헐값에 가공용으로 처분된다. 이런 식으로 매년 1조 원이 훨씬 넘는 혈세가 허공으로 증발한다고 보면 된다.
이런 현실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쌀 과잉생산을 더 부추기게 될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밀어붙이고 있다. 현행 양곡관리법에는 ‘쌀 시장격리’가 정부의 재량사항인데, 아예 의무조항으로 ‘대못질’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24일 “양곡관리법 처리를 반드시 매듭짓겠다”고 강조하면서 주된 명분 중 하나로 ‘식량안보’를 내세웠다.
현재 가장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식량안보’의 정의는 1996년 세계식량정상회담에서 논의된 내용에 바탕을 두고 있다. ‘모든 사람이 활동적이고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식습관과 음식선호를 충족시키는 안전하고 영양가 있는 식탁에 물리적·경제적으로 언제든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식량안보의 정의다.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는 대목은 ‘음식선호’다. 어떤 비상상황에서도 밥, 잡곡, 라면, 빵, 고기, 야채 등을 식탁에 골고루 공급할 수 있어야 진정한 식량안보가 이뤄지는 것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지난해 9월 민주당 개정안이 그대로 시행되는 경우를 가정해 추산한 바에 따르면 2022년부터 2030년까지 초과생산된 쌀을 ‘시장격리’시키는 데 매년 평균 1조443억 원의 재정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 일부 민주당 의원은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함께 포함돼 있는 ‘쌀 생산조정제’(타 작물 재배 지원사업)의 효과 때문에 쌀 생산이 줄어들어 시장격리 상황 자체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자가당착이다. 쌀 시장격리를 할 필요가 없어지는데, 굳이 재량사항을 의무사항으로 바꿀 이유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한국의 공공비축과 시장격리 제도가 얼마나 심각한 자원 낭비인지는 쌀 소비량이 우리의 2배가량인 일본과 비교해 봐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2022년 생산분의 경우 한국은 공공비축용과 시장격리용으로 각각 45만 t씩 총 90만 t을 사들였다. 이에 비해 일본은 20만 t을 공공비축용으로 사들였다. 정부 예산으로 남아도는 쌀을 사들여 시장에서 격리시키는 제도는 아예 없다.
개정안을 ‘악법’으로 볼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법안이 담고 있는 ‘메시지’ 때문이다. 개정안의 내용은 쌀을 아무리 많이 생산해도 과잉생산 물량을 정부가 사들여서 가격을 떠받칠 테니 마음 놓고 쌀농사를 지으라고 권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쌀 과잉생산의 악순환이 끝없이 되풀이될 것이다. 민주당이 국회의장의 중재를 받아들였다며 내놓은 수정안도 본질은 매한가지다. 숫자 몇 개 바꾸고 조건 한두 개 더 붙였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이 대표는 2021년 2월 25일 대선후보 토론에서 당시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를 상대로 마치 가르치기라도 하듯 “식량안보란 밀, 콩 같은 전략식량에 대해 지원금을 준다는 뜻”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한정된 재정 여건상 밀, 콩 같은 전략식량을 지원하려면 ‘밑 빠진 독’이나 다름없는 쌀 시장격리 의무화 조항은 폐기하는 것이 마땅하다. 정작 자신은 아는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남을 가르치려 드는 것은 정치지도자가 아닌 요설가의 행동이다. 이 대표가 자신이 했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고, 한국의 식량안보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잘못을 범하지 않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