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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 태우고, 합성… 사진 실험 질주한 황규태[윤범모의 현미경으로 본 명화]

입력 | 2023-02-28 03:00:00

황규태 사진작가의 1963년 작품 ‘숲속의 아침’. 동국대 교정에서 각각 촬영한 숲과 새의 이미지를 겹쳐놓고 한번에 인화한 합성사진이다. 황 작가는 일찍이 몽타주 작업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필름을 태워 프린트한 버노그래피를 최초로 선보였으며 디지털 시대의 픽셀 작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실험을 계속해 왔다. 류가헌 제공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


이파리 하나 없는 키 큰 나무들이 모여 있다. 안개가 낀 고요한 아침 풍경이다. 앙상한 나무들 사이로 새들이 날고 있다. 웬 새들이 숲속을 산책하고 있을까. 이런 장면을 어떻게 카메라에 담았을까. 사실 이 작품은 합성사진이다. 당시 사진계는 스트레이트(straight) 사진만 중시하던 시절이었다. 조작하는 사진, 그러니까 작가 임의대로 합성하는 행위는 금기시되던 시절이었다. ‘공부보다 카메라에 미친 엉터리 학생’ 황규태는 동국대 교정에서 숲을 촬영했고, 또 새들을 촬영했다. 그러니까 문제의 초기작 ‘숲속의 아침’(1963년)은 숲과 새를 각각 찍은 필름 두 장을 겹쳐놓고 한번에 인화한 것이다. 이 작품은 현재 ‘사진이 걸린 방―큐레이터 최연하 컬렉션’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다(서울 종로구 청운동의 사진 전문 공간인 ‘류가헌’에서 3월 5일까지).

큐레이터 최연하는 자신의 집 안에 걸려 있던 사진 작품들을 전시장으로 옮겨놓았다. “좋은 사진 작품을 매일 보면 ‘일상이 작품이 되는’ 즐거운 경험에 이른다. 일상이 작품이 되는 일이란, 생생하고 창의적으로 자기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삶을, 지금-여기의 일상에서 영위하는 일”이란 취지에서 단행한 것이다. 큐레이터의 방에 걸려 있던 사진 작품들 가운데 박승훈, 박홍순, 이갑철, 이건영, 이병훈, 이한구, 임채욱, 장보연, 하지권, 한금선 등의 27점이다. 사진을 옮긴 큐레이터가 전시 기획을 한 지 20주년이 되는 해에 마련한 조촐한 기념 전시이기도 하다. 사진평론가이자 전시 기획자인 최연하는 월부로 사진 작품 한 점을 산 이래 연봉 10%만큼의 사진 작품 구입을 목표로 삼아 왔다. 그러니까 작품 입수의 배경이 모두 다르면서 각각의 사연이 숨어 있다. 여기에 황규태의 ‘숲속의 아침’이 있다. 이 작품은 어떻게 소장하게 되었을까. 출품작 옆에 붙어 있는 해설, 거기에 이런 문장이 있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밥 사주는 작가님’, 황규태 선생님의 사진이다. 어느 날 선생님은 당신의 작품을 한동네에 사는 세 친구에게 한 점씩 주셨고, 숲을 좋아하는 나는 이 작품을 골랐다. 이 사진은 미국 ‘U.S. 카메라’사(社)가 주최한 ‘U.S. 카메라 콘테스트’에서 4등으로 입선한 작품으로, 1963년 흑백 몽타주 한 사진이다(현재 한미미술관에도 전시돼 있다). 자유롭고 창의적이고 주체적인 영원한 청년 작가!”

‘사진이 걸린 방―큐레이터 최연하 컬렉션’에 전시 중인 오상조 작가의 ‘당산나무’. 작가의 고향인 전북 장수의 당산나무를 신령스러운 분위기로 포착해 냈다. 류가헌 제공 

그러고 보니 눈길을 끄는 작품 해설이 많다. “아침의 활기를 찾고 싶을 때, 나는 ‘김제평야의 싱싱한 배추와 정읍 고부의 신령스러운 탱자나무’에게 고정남식의 사투리로 인사를 한다. ‘앗-따! 반갑당게로-’·”(고정남) “풍경과의 조우, 풍경은 사유를 강요한다. 한 그루 나무는 실재이고 은유이다. 나무는 우리를 유혹하고 끌어당기고 품는다. 소유될 수 없는 사물, 욕망될 수 없는 이미지, 내 의식과 현존을 일깨우는 풍경은 사물이 되고, 사물은 풍경이 된다.”(박선주) “박종우 작가님의 전시를 ‘슬쩍!’ 도왔을 뿐인데, 내게 영광의 빛-오로라를 선물로 주셨다. 나는 이 사진을 침실에 걸어두고 내 잠과 내 꿈이 오로라처럼 환상적이길 바라곤 한다. 그래서 잠 속으로 순식간에 깊이 빠져드나 보다.”(박종우) “내 인생의 첫 번째 사진 전시 관람 중 만난 작품이다. 이십대에 이르러서야 겨우 텔레비전을 시청할 수 있었던 내게 이미지의 놀랍고 신비로운 힘을 안겨 준 최초의 사건이었다. 나는 왜 이 사진에 오래도록 경도되어 있었을까. 사진에서 음악 소리가 들리고, 그들이 앉은 풀숲에 일렁이는 바람과 저만치 떨어진 호수의 청량한 물빛이 내게로 쏟아질 듯, 나는 이 사진을 ‘들으면서’ 보았다.”(성남훈) “내 고향 장수의 당산나무다. 신령스럽고 고혹적이고 늠름하고 당당한 나무다. 어찌 작품 구입을 아니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작품을 거실 한가운데에 걸어두었다.”(오상조) “파도와 해류를 살피고, 깊은 바닷속의 흐름을 알려주는 우주의 신호에 접속해 고요히 침잠하고 기다린 끝에 찍은 사진들. 장재연 작가가 800번의 다이빙을 통해 바다에서 만난 수많은 생명체의 사진은 재단법인 숲과 나눔이 만든 에코 포토 아카이브에서도 열람할 수 있다.”(장재연)

황규태는 1965년 도미하여 오랫동안 컬러 현상소에서 현상기사로 일하면서 다양한 실험을 했다. 그중 몽타주 작품은 주목을 끌었다. 특히 필름을 태워 프린트한 버노그래피(Burnography)는 세계 최초의 작업이었다. 평생 실험정신을 바탕으로 작업한 황규태는 ‘픽셀 샤먼-디지털 우주의 방랑자’라는 평가처럼, 디지털 시대답게 순수 형태인 픽셀에 의한 작업을 보여줬다. 황규태의 진면목은 현재 부산 고은사진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사진에 반하다’(3월 12일까지)는 60년 사진 인생이 정리된 회고전이다. 초기의 흑백 스트레이트 사진부터 블로 업(blow up), 포토몽타주(photomontage), 버노그래피, 그리고 가장 작은 단위인 픽셀 작업까지 다양하다. 근작 픽셀 계열은 작품 제목을 확인해야 제작 의도를 알 수 있다. 그만큼 철학적이어서 심오해졌다는 의미다. 픽셀 작품은 사진의 경계선을 넘나들면서, 사진의 존재 의의를 새롭게 한다. 80대 중반에도 청년 작가처럼 작업하는 모습은 경이롭다. 인품이 너그러워서인지 주위에 젊은 사람이 많다. 가수이자 작곡가인 ‘어린’ 김수철은 원로 작가를 ‘규태 형’이라고 부른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