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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의 봄을 기다린다[동아광장/김금희]

입력 | 2023-03-01 03:00:00

토로와 복수는 있되 이해와 용서 없는 현실
막막함 타개하고 다독일 ‘어른의 말’ 아쉬워
마음속 어른 꺼내야 타인 어른됨 볼 수 있다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


고 김수환 추기경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 ‘바보야’를 시청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많은 국민에게 존경받은 사표일 것이다. 1969년 한국인 최초로 추기경으로 서임되고 30여 년간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그가 책임져야 했던 시대는 다큐멘터리에서 그가 요약한 대로 ‘암흑’이었다.

한국가톨릭 수장으로서의 발자취 이외에도 내가 흥미롭게 받아들인 건 사제로 입문하기 전 어린 김수환 추기경의 모습이었다. 1922년생으로 일제강점기를 그대로 체험한 그는 3·1운동이나 독립운동가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항일 정신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 뜻에 따라 예비 사제로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지만 주권을 빼앗긴 조국이라는 ‘현실’은 어린 그에게 신앙 못지않은 중요한 주제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윤리 시험에 천황의 은혜에 대한 감상을 적으라는 문제가 출제되었다. 준비했던 시험 내용과는 상관없는 것이었고 그의 평소 생각과도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는 시험지에다 결국 “일, 나는 황국 신민이 아니다” “이, 그러니 소감이 없다”라고 적어냈다. 김수환 추기경은 그 일에 대해 겸양의 의미를 담아 반항심이라고 설명했지만 사실 그것은 신념이었을 것이다. 아직 자라고 있는 존재가 지니는 풀잎처럼 맑고 여린 신념 말이다.

이후 그는 당연히 교장실로 불려갔고 그가 신학생이기에 거기에는 그 당시 주교까지 도착해 있었다고 한다. 이제 학교에서 쫓겨나겠구나 생각하며 들어갔을 때 그는 조선에서의 공부를 마친 뒤 일본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라는 주교의 명을 받는다. 그를 둘러싼 어른들은 그의 신념을 꺾거나 벌주는 대신, 미래를 위한 가능성으로 보고 가치 있게 여겼다.

어제는 외출을 나갔다가 도산공원을 둘러보았다. 도산 안창호 선생을 기념하는 그 공원에는 기념관도 조성되어 있었다. 전시품 중에 내가 가장 골똘히 들여다본 건 안창호 선생이 주축이 되어 만든 조직에서 해외 동포들에게 발급한 일종의 주민등록 서류였다. 떠나온 곳, 같이 사는 사람 등의 항목이 요즘 같은 딱딱한 한자어가 아니라 한글로 풀어 씌어 있었다. 이방인들의 나라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서류화한다는 것은 자신들이 고국에서부터 이어진 역사적 존재임을 인식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 서류의 항목들조차 때론 안부를 묻는 일처럼 뭉클하게 다가왔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창호 선생은 탁월한 사상가인 동시에 독립을 위한 실질적인 자주와 자치, 자립에 방점을 둔 재정 조직가였다. 3·1운동 직후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행한 연설에서 그는 말과 사상으로 하는 운동뿐 아니라 실질적인 물적 토대의 조성을 통한 독립운동을 강조하며, “내가 며칠 후에는 피 흘리는 이에게 절하겠소마는 오늘은 돈 바치는 이에게 절하겠소”라고 역설했다. 미국 하와이로 건너가 한인 노동조직을 만들기도 한 그는 “오렌지 하나라도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것이다”라며 자기 자신이 세상의 변화를 이끄는 중심이라는 실천적 진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그의 유명한 표어인 ‘애기애타(愛己愛他)’는 타인에 대한 사랑을 강조한 말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겨야 이후를 도모할 수 있다는 ‘어른’의 말이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기념관을 둘러보는데, 한 초등학생이 엄마와 함께 전시관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나이 든 관리자분이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혹시 엄마가 싫어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지켜보았는데 대화는 내가 우려한 대로 흐르지 않았다. 그분은 아이에게 독립운동가들 이름을 아는지 물었고 아이는 스스럼없이 대답하기 시작했다. 아홉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아이는 꽤 많은 이름들을 알고 있었다. 안중근, 유관순, 이봉창 하는 아이의 그 낭랑한 호명은 ‘와’ ‘대단하네’ 같은 그 어른의 추임새와 함께 어제의 가장 희망적인 장면이 되었다.

사실 요즘 나를 가장 힘 빠지게 하는 것은 막막함을 이겨낼 귀한 말을 듣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토로는 있되 이해는 없고 복수는 있되 용서는 없다. 누군가 이 문제를 해결해줄 어른이 없을까 기대하기도 했는데, 기념관을 나오면서는 이제 그런 것을 기대하기에 우리 모두가 이미 어른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도산의 표현을 빌린다면 우리부터 먼저 어른이 된 뒤에야 타인의 어른됨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 그러니 3·1절과 함께 시작되는 이 봄에 각자 마음속에 있는 어른을 이제 좀 꺼내봤으면 좋겠다. 생각해 보면 해방이라는 역사적 사건조차도 바로 그 어른들의 협심을 통해 오지 않았던가.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