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금산조 이생강 명인
지난달 27일 서울 성북구 이생강 대금산조전수관에서 대금을 불고 있는 이생강 명인(86). 이 씨는 “소중한 우리 음악이 훗날 사라질까봐 두렵다”며 “온 국민이 ‘우리 것’에 대해 알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내 인생에 남은 업”이라고 말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지금도 잠은 하루 4시간만 잡니다. 대금부터 소금, 피리, 태평소 등등… 관악기 6종을 1시간씩만 연습해도 7~8시간은 훌쩍 가요. 남들 잘 때 다 자고 놀 때 다 놀면 어떻게 여기까지 왔겠습니까.”
우리나라 대금 연주의 대가 죽향(竹鄕) 이생강 명인(86)은 지난달 27일 이렇게 말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예능 보유자인 그는 이생강류 대금산조의 창시자다. 맑은 음색과 구슬 같은 새소리 표현이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이달 22일 그는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에서 열리는 국악 명인 기획공연 ‘일이관지’에서 독주곡인 대금산조를 연주한다. 피리 이종대, 아쟁 이태백과 합을 맞춰 시나위도 선보인다.
이 명인은 다섯 살에 처음 단소를 잡은 이후 80년간 국악 외길을 걸었다. 제도권 음악 교육을 받지 못해 스승을 찾아다니며 실력을 키웠다. 일본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단소를 불던 아버지를 위로하려고 따라 분 것이 시작이 됐다. 그 즈음 아버지는 그에게 본명 이규식 대신 굳셀 강(剛) 자를 쓴 지금의 이름을 지어줬다. 그는 “대나무처럼 강해도 부러지지 말란 의미에서 강할 강 대신 굳셀 강을 썼다”며 “강자에 지지 말고 살라 하셨다”고 회고했다.
이생강 명인은 흐트러짐 없는 연주 비결에 대해 “어릴 적 이불 속에 숨어 태평소를 연습하던 게 지금의 폐활량을 만들었다”며 “태평소는 소리가 커서 산에서 불다가도 혼이 나곤 해 숨어거 불었다”고 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1945년 해방이 되자 그는 연락선을 타고 한국으로 들어왔다.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의 권유로 ‘예인’이 많은 전라도로 향했다. 전주역 앞에서 태평소를 불던 그는 우연히 대금 연주자 고(故) 한주환 선생을 만난다. 본격적으로 대금을 배우게 된 출발점이다.
“밤이 되면 야시장에 나가 은행 앞 계단에서 피리를 불었어요. 아버지가 만든 피리를 팔며 푼돈을 벌었죠. 경찰 단속이라도 나올까 친구들이 망을 봐줬고요. 민속악은 음악 축에도 안 끼워주던 시절이라 사람들은 연주에 감탄하면서도 저를 ‘피리쟁이’라고 부르며 무시했습니다. 그럼에도 연주하니 좋았죠. (웃음)”
이 명인은 자신의 호 ‘죽향(竹鄕)’을 따라 남은 생을 대금 연주에 바칠 것이라고 했다. 죽향에는 대금의 원형인 대나무라는 의미와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그의 신념이 모두 담겨있다. 우리 기악을 연주하는 제자들을 양성하는 데도 꾸준히 힘쓴다는 계획이다.
“자식들에게 ‘나 죽으면 어디 묻지 말고 대나무 속에 넣어달라’고 했어요. 이승 아닌 곳에서도 대금과 함께하고 싶어서요. 대금은 제 숨이나 다름없어요. 평생 힘닿는 때까지 손에서 놓지 않을 겁니다.”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