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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훈 기자
첨단기술의 해외 유출은 기술전쟁 시대에 가장 매국적인 범죄 가운데 하나다. 수사당국에 따르면 최근 5년간 국가핵심기술 36건을 포함해 112건의 기술이 해외 유출됐고, 이로 인한 피해 규모는 26조원에 달한다. A 씨 일당이 입힌 피해는 최소 1000억 원대다. 피해규모를 밝히지 않은 기업들까지 합치면 막대할 것으로 전망된다.
핵심기술 인력의 해외취업을 막을 방법은 마땅치 않다. 더구나 중국의 해외 기술 탈취 기도는 점차 치밀해 지고 있다. 기업들은 경쟁업체 취업을 막기 위해 ‘전직금지 약정서’를 쓰게 하고 그 대가를 지불하기도 한다. 하지만 2~3년 이상 그런 약속을 강요하기 힘들다는게 업계의 중론이다.
중국의 기술 탈취 기도는 점차 심해지고 있다. 그래픽 동아일보 DB
이런 상황에서 특허청이 도입해 23일 첫 합격자를 발표한 ‘반도체 분야 전문임기제 특허심사관 제도’가 주목받고 있다. 전문적 지식이나 기술 업무를 수행하는 임기제 공무원 채용제도다. 5급 상당으로 최초 2년 근무 후 최대 10년 까지 연장이 가능해 퇴직한 전문직 연구원들을 흡수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30명 모집에 국내 굴지의 대기업 반도체 전문가 175명이 지원해 6 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통상 2~3 대 1 정도의 전문임기제 심사관 경쟁률에 비춰 이례적으로 높다.
이번 합격자 연령은 평균 53.8세로 최고령은 60세, 최연소는 41세였다. 83%가 석박사 학위를 소지하고 반도체 분야 경력이 평균 23년 9개월인 반도체 베테랑 전문 인력들이다.
류동현 특허청 차장은 “전문임기제는 민간의 우수 퇴직인력을 공공 영역에 활용하는 새로운 실험”이라며 “이를 통해 반도체 분야 핵심인력의 해외 이직을 방지하고 반도체 특허의 신속·정확한 심사가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 한다”고 밝혔다.
한 합격자는 지원 동기를 묻는 질문에 “국내 반도체 업계 동료 다수가 해외로 스카우트 되는 현실을 보며 기술 유출의 문제점과 특허의 중요성을 체감했다”고 했다. 다른 한 합격자는 “신속성이 생명인 반도체 기술 특허가 신청에서 특허 등록까지 2년여가 걸린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반도체인으로서 매우 안타까웠다”고 전했다.
법학·약학·특허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로 이뤄진 ‘기술범죄의 추적자’ 특허청 기술디자인특별사법경찰. 특허청 제공
애써 개발한 첨단 기술이 유출될까 노심초사했던 기업들도 환영하고 있다. 한 기업 관계자는 “반도체 기업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이 정부 정책이 지속적으로 추진되길 희망한다”며 “여타 첨단기술 분야로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특허청은 올 하반기에 반도체 분야 전문 특허심사관의 추가 채용을 추진하는 한편 행전안전부 등과 협의해 2차전지 등 다른 기술 분야로 확대할 계획이다.
특허청에 따르면 매년 국내 반도체 2개사와 디스플레이 2개사 등 총 4개 사의 연간 퇴직 인력만도 1500명에 이른다. 특허청이 당초 특허심사관 200명 채용을 관계부처에 요청한 것도 이런 사정을 감안한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공무원 수 동결 방침에 따라 우선적으로 30명만을 승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허청은 이들 합격자에 대해 한 달 간 신원조사 등 필요한 절차를 마치고 공식 임명식을 가질 계획이다. 연일 반도체 인재 양성 방안을 강조해온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임명식장에 깜짝 등장해 제2의 출발을 하는 이들의 손을 잡아주면 어떨까.
대전=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