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 러몬도 미 상무장관이 23일(현지시간) 워싱턴DC 조지타운대에서 ‘미국의 기술 리더십을 위한 반도체법과 장기 비전’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사진=뉴스1
자국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 구축에 나서며 막대한 보조금을 내건 미국이 지원 조건을 갈수록 까다롭게 하고 있다. 보조금을 주는 대신 일정 수준 이상의 초과이익을 거둘 경우 미국 정부와 공유할 것과 보안이 중요한 반도체 시설 공개까지 요구하고 나섰다.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에 기업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보조금을 받으면 중국 등에 10년간 신규 투자를 할 수 없다는 ‘가드레일’ 조항까지 예고된 상황에서 투자 득실 계산이 복잡해졌다.
그제 미 상무부는 반도체과학법에 따라 520억 달러 규모의 반도체 보조금을 지급하는 6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1억5000만 달러 이상 지원금을 받는 기업이 예상을 초과하는 이익을 올릴 경우 일부를 미국 정부가 환수하겠다고 했다. 반도체 생산 및 연구 시설을 미 정부에 공개하는 기업에 보조금 우선순위를 두겠다는 뜻도 밝혔다. 보조금을 활용한 배당금, 자사주 매입을 제한하고 보육 시설을 설치하도록 하는 등의 부담스러운 조건도 붙었다.
미국 정부의 조건은 지나치다. 첨단기술을 두고 경쟁하고 있는 반도체 기업에 핵심 보안시설의 문을 열어달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다. 초과이익 환수를 이유로 기업의 회계장부까지 들여다보겠다는 것도 지나친 경영 간섭이 될 수 있다. 미국 내에서도 기업들에 부담을 주면서 반도체 공장 건설을 어렵게 하는 ‘과도한 시장 개입’이라는 비판이 제기될 정도다. 한국 기업들로선 덜컥 보조금을 받았다가 오히려 족쇄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는 개별 기업의 노력에만 맡겨 둘 수 없는 일이다. 정부가 나서 외교력을 발휘해야 한다. 최근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대규모로 투자해 일자리 창출에 기여했고, 미국 대통령도 거듭 감사를 표시했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보조금 조건의 예외 인정, 반도체 중국 수출 제한 유예 기간 연장 등의 약속을 받아내야 한다. 필요하면 일본 대만 등 동맹국과 공조를 통해 함께 목소리를 높일 수도 있다. 지난해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제정으로 한국 기업이 보조금 차별을 당할 때처럼 뒷북 대응을 되풀이해선 안 된다. 미국에 협력할 것은 협력하되 무리한 요구에는 적극적으로 대응해서 한미가 서로 윈윈하는 해법을 이끌어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