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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뒤에 숨은 사이버 폭력 끊기 위해 한국형 측정 척도 개발”

입력 | 2023-03-02 03:00:00

전종설 이화여대 교수 인터뷰
교묘해지는 사이버 폭력 사례 보며, 국내 실태 조사 도구 필요성 느껴
명의 도용, 게임 아이템 갈취 등 학생 인터뷰 바탕으로 문항 제작
온라인에선 가해자-피해자 모호… 정확한 실태 파악과 예방책 시급




새 학기를 앞둔 학부모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 중 하나가 학교 폭력이다. 학부모라면 한 번쯤 ‘내 아이가 누굴 괴롭히거나, 괴롭힘을 당하는 건 아닐까’라는 걱정이 들기 마련이다. 특히 최근 학교 폭력의 양상은 부모 세대가 겪었던 것과는 또 다르다. 온라인이라는 익명의 공간에 숨어 더 은밀하고 집요한 괴롭힘이 발생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지난달 27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연구실에서 만난 전종설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사이버 폭력은 피해가 광범위하고 확산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조기 개입과 예방 노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지난달 전종설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한국형 사이버 불링(괴롭힘) 측정 척도’를 개발했다. 국내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다양한 유형의 사이버 폭력을 객관적으로 측정해 더 효과적인 예방책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지난달 27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에서 만난 전 교수는 “정부가 다양한 지표를 통해 자살 고위험군을 선제적으로 관리하는 것처럼, 사이버 폭력에 노출된 학생들의 위험도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고 말했다.


● 초중고교생 4명 중 1명은 ‘사이버 폭력’ 경험

학교 현장에서 사이버 폭력에 관한 관심이 커진 것은 10년 남짓이다. 2012년 학교폭력예방법에 ‘사이버 따돌림’이 새 유형으로 추가되면서, 본격적인 실태조사가 시작됐다. 교육부의 2022년 조사에서 전체 학교 폭력 발생 건수 중 사이버 폭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9.6%로 나타났다.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사이버 폭력을 경험했는지를 살펴보면 그 심각성이 더 두드러진다. 2021년 방송통신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초등 4학년∼고교 3학년의 23.4%가 언어폭력, 명예훼손, 따돌림 등의 ‘사이버 폭력 피해를 겪었다’고 응답했다. 피해만 당한 학생은 15.1%, 가해와 피해 경험이 모두 있는 학생은 8.3%였다. 5.8%는 가해 경험만 있었다.

전 교수가 사이버 폭력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은 청소년의 인터넷 및 스마트폰 중독을 연구하면서다. 사례 연구를 위해 만난 학생 상당수가 형태를 달리한 사이버 폭력을 경험하고 있어서 그 심각성을 알게 됐다.

하지만 날로 지능화되는 사이버 폭력의 심각성에 비해 정확한 실태 파악 도구는 마땅치 않았다. 전 교수는 “개인마다 사이버 폭력에 대한 정의가 다르기 때문에, 조사 문항에 따라 심각한 정도가 달라 보이는 한계가 있었다. 국내 현실을 반영한 구체적인 질문과 실태 조사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 갈수록 지능화되는 사이버 폭력
전 교수 연구팀은 사이버 폭력 유형을 △언어 및 성적(性的) 공격 △침범 및 소외 △협박 및 갈취 등 크게 3가지로 나눈 뒤 총 16개 평가 문항을 만들었다. 국내에서 특히 많이 발생하는 사이버 폭력 유형을 최대한 반영했다. ‘나를 사칭하는 온라인 게시글 때문에 비난을 받은 적 있다’ ‘온라인에서 게임 아이템, 모바일 데이터 등을 요구당한 적 있다’ 등이다.

이는 학생들이 인터뷰에서 실제로 밝힌 내용이다. 최근 10대 사이에선 또래의 명의를 도용해 공유 킥보드 등을 이용하고 대신 결제를 시키거나, 모욕적인 동영상 촬영을 강요한 뒤 퍼뜨리는 등 사이버 폭력 형태가 지능화되고 있다.

전 교수는 “친구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비밀번호를 협박해서 알아낸 뒤 당사자 사칭 글을 올려 온라인 공간에서 집단 따돌림을 유도하거나, 음란물에 지인 얼굴을 합성해 퍼뜨리는 경우도 많다”며 “이는 해외에선 드물지만, 한국에선 흔하게 나타나는 괴롭힘 유형”이라고 설명했다.

학생들은 조사 문항마다 0∼4점까지 5단계로 사이버 폭력 경험을 답하게 된다. 연구진은 응답한 점수 평균에 따라 학생들의 사이버 폭력 노출 위험도를 측정해, 그 정도에 따라 어떤 개입이 필요한지도 제시할 예정이다. 전 교수는 “가령 평균 점수가 1점이면 ‘사이버 폭력 위험 노출’, 2점 또는 3점 이상이면 ‘고위험군’ 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말했다.


● “방관자, 피해자도 가해자 될 수 있어”
사이버 폭력 피해자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시공간을 초월해 피해가 계속 확대 재생산된다는 점이다. 신체나 언어적 폭력은 가해자와 같은 공간만 벗어나면 피할 수 있다. 하지만 사이버 폭력은 24시간 내내, 자신도 모르는 순간에도 발생한다. 온라인에서 유통되는 합성 사진이나 명예훼손을 일으키는 글들은 쉽게 지울 수도 없다.

‘익명’ 뒤에 숨은 가해자를 특정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물리적 폭력의 경우엔 가해 학생과 피해 학생을 분리할 수도 있지만, 사이버 폭력 피해자는 이런 조치도 어렵다. 전 교수는 “익명성이라는 특징 때문에 폭력의 수위가 더 올라가고, 피해자는 가해자와 계속 같은 ‘사이버 감옥’에 갇히게 된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사이버 폭력 발생 초기에 피해 확산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피해 신고를 위해 사이버 폭력 증거를 체계적으로 수집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이나, 학생의 휴대전화에서 발생하는 사이버 폭력을 인공지능(AI) 등으로 감지해 부모에게 알려주는 프로그램 등이다.

전 교수는 “일반적인 학교 폭력은 가해자와 피해자, 방관자가 분명히 나뉜다. 하지만 온라인 세계에선 방관자가 가해에 동참하거나, 피해자가 보복 심리에 또 다른 가해를 저지르는 경우도 적지 않다”며 “정확한 실태 조사와 예방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박성민 기자 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