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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유근형]붓글씨 장인은 AI로 대체 가능한가

입력 | 2023-03-02 21:30:00

유근형 사회부 차장


“인공지능(AI)이나 로봇을 시키면 될 일 아닌가.”

인사혁신처가 공무원 임명장을 붓글씨로 적는 필경사(筆耕士)를 새로 뽑는다고 하자 일각에선 이 같은 반응이 나왔다. 대통령 명의의 공무원 임명장을 15년 동안 매년 4000여 장씩 붓과 먹물로 쓰던 김이중 사무관은 최근 개인 사유로 퇴직했다.

후임자 채용을 반대하는 이들은 요즘 시대에 필경사 업무가 굳이 필요하냐고 묻는다. 임명장 문구가 매번 비슷할 텐데, 명인의 필체를 샘플로 만들어 활용하면 된다는 것이다. 김 사무관의 후임자를 뽑고 정년까지 일하게 하려면 예산이 적어도 10억 원 이상은 든다.

AI 붓글씨 로봇도 대안으로 꼽힌다. 한국기계연구원이 개발한 로봇 ‘소프트그리퍼’는 직접 벼루에 먹물을 붓고, 붓에 먹물을 묻힌다. 화선지에 먹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먹물을 털기까지 한다. 아직 명필 수준은 아니지만, 향후 일반인의 눈으로는 구별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고도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아무리 AI가 정교해진다고 해도 따라가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붓으로 밭을 간다’는 ‘필경’의 본뜻처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손 글씨의 힘이 그렇다.

김 사무관은 30자 남짓의 임명장을 20분가량 걸려 정성스레 썼다고 한다. 밭 갈듯 국정을 비옥하게 가꿔 달라는 마음도 담았을 것이다. 한 글자 한 글자 눌러쓴 대통령 명의의 임명장을 받아들고 초심을 다졌을 관료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AI가 쓴 임명장을 받고서는 느끼기 어려운 감정이다.

예전에는 필경이 더 중요했다. PC가 보급되기 전 대기업 근처엔 보고서 글씨를 대신 써주는 업체들이 있었다. 개중에서 회장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씨체를 보유한 업체들이 호황을 누렸다고 한다. 사장단 회의가 몰리는 연말연시에는 업체 섭외를 위한 부서 간 경쟁도 치열했다고 한다.

관가나 기업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손 글씨에 마음이 움직인 경험은 있을 것이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힌 ‘국군장병 아저씨께’로 시작하는 위문편지를 받아본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롱디(Long Distance의 줄임말·장거리 연애) 중 예고 없이 찾아온 연인의 손 편지를 받아본 사람도 알 것이다. 최근엔 배달음식에 붙은 ‘감사합니다’란 손 글씨 인사만 봐도 조금은 마음이 따뜻해진다.

AI 시대에 인간의 역할이 줄어도 가장 인간다운 ‘감정’의 중요성은 계속될 것이다. 미래학자들도 동의하는 부분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 혼을 담는 작업, 전문가가 아니고는 챙기기 어려운 디테일은 여전히 인간의 영역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최근 챗GPT 등장 이후 ‘AI로 인해 내 직업이 사라지지 않을까’라는 고민을 하는 직장인들이 적지 않다. 지금이라도 ‘지금 하는 일에 영혼을 담고 있는지’를 자문해 보는 건 어떨까. 필경사 논란을 지켜보며 AI 시대의 생존법은 어쩌면 그 뻔한 ‘마음’에 달려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문해 본다. 좋은 기사를 쓰기 위해 오늘 하루 혼을 다했는가. 한 자 한 자 마음을 담아 글을 써내려갔는가.



유근형 사회부 차장 noe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