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중앙은행 새 사령탑에 쏠린 세계 금융시장의 시선 우에다 차기 日銀총재 청문회 통해 “금융완화 장점 더 커” 일단 ‘고’ 시사 10년 이어진 돈풀기 정책 ‘아베노믹스’… “장기 저금리로 경제 신진대사 망가져” 국가 지출 팽창하는 한국에 시사점… 시장에선 “아베노믹스 이제는 갈림길”
지난달 24일 일본 도쿄 국회 중의원 운영위원회. 세계 3위 기축통화인 일본 엔화의 새 사령탑 일성(一聲)에 세계 금융시장의 이목이 쏠렸다. 4월 8일 퇴임하는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일본은행 총재의 후임으로 지명된 우에다 가즈오(植田和男) 총재 후보가 한국 국회의 인사청문회에 해당하는 ‘소신 청취’에 나선 자리였다. 엔화는 세계 외환 거래량의 16.7%(2022년 국제결제은행 기준·총합계 200%)를 차지하며 미국 달러화, 유로화에 이은 3대 기축통화의 지위를 갖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 취임 이후에도 끝이 보이지 않던 일본의 경제정책 아베노믹스가 갈림길에 섰다. 차기 총재는 ‘현상 유지’를 할 뜻을 밝혔지만, 시장에서는 여전히 출구전략을 모색할 것이란 전망이 이어지고 있다.
● ‘돈 풀기’로 시장 부양해온 아베노믹스
정부 입김과 정치 논리에 휘둘리지 않는 정책의 독립성은 각국 중앙은행의 기본이다.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올 1월 “고물가를 끌어내리기 위해 경제를 둔화시키는 금리 인상 같은 조치가 인기가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중앙은행은 자율성을 보장받아야 한다”라고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대담한 금융정책, 기민한 재정정책, 민간 투자를 이끄는 성장 전략. 아베노믹스의 기둥인 ‘3개의 화살’이다. 중앙은행이 돈을 풀고 정부가 재정 지출을 늘리면 경기가 살아나 기업들이 투자할 환경이 조성될 것이라는 논리다. 아베 전 총리는 총리 재취임 2개월 만인 2012년 2월 미국을 방문해 “아임 백(I′m back). 일본도 그래야 한다”라고 연설했다. 1970, 80년대 잘나갔던 일본 경제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포부였다.
● “아베노믹스, 생산성에 심각한 악영향”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저해하는 행위는 엔화 신용도에 악영향을 끼칠 뿐이다.” 구로다 총재 전임인 시라카와 마사아키(白川方明) 전 일본은행 총재가 2013년 퇴임 기자회견에서 아베 전 총리를 향해 던진 작심 비판이다. 당시만 해도 ‘떠나는 자의 뒤끝’ 정도로 보는 평가가 있었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그의 말은 미래를 예언한 것처럼 맞아떨어졌다. 시라카와 전 총재는 2일 국제통화기금(IMF)에 발표한 기고문에서 “물가 상승, 경제 성장 모두 아베노믹스의 효과는 미미했다. 금융완화가 10년 이상 지속되면 생산성에 미치는 악영향이 심각해진다”고 당시의 판단이 옳았음을 강조했다.
일본 정부 스스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장기간 호경기’라고 표현할 정도로 일본 경제는 일부 숫자로는 좋은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아베노믹스를 성공한 경제정책이라고 평가하는 목소리는 크지 않다.
애초에 진단이 틀렸다는 비판도 있다. 거품 붕괴 이후 얼어붙은 경제 심리, 기업들의 혁신 실패, 저출산 고령화 장기화, 이에 따른 내수 수요 감소 등 악순환의 결과물이 물가 정체인데, 물가를 끌어올리겠다고 고질병을 방치한 채 돈만 풀다 보니 침체 탈출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일본은행 조사통계국장을 지낸 하야카와 히데오 도쿄재단 정책연구소 연구원은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 “(아베노믹스를 지지하는 이들은) 디플레이션을 경기 침체의 원인으로 본다. 디플레이션 때문에 경제가 침체했으니 물가를 올리면 경제가 좋아진다는 논리인데, 대부분의 학자는 디플레이션을 결과로 여긴다”라고 지적했다.
● 차기 日銀 총재, 정책 변화 가능성 열어둬
우에다 후보는 국회 답변에서 금융완화를 유지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도 정책 변화의 가능성을 완전히 닫아 두지는 않았다. 그는 일본은행이 국채를 매입해 시장 금리에 손을 대는 정책에 대해 “다양한 부작용을 부정할 수 없다”며 “무엇이 가능할지, 여러 가능성이 있다. 구체적인 걸 말하는 건 삼가겠다”라고 밝혔다. 아베노믹스의 수정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은 것이다.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은 최근 물가 인상과 그에 따른 임금 인상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비록 미국, 유럽의 인플레이션 압력에 따른 것이지만 주요 7개국(G7) 중 최하위(2021년 기준 3만9711달러)인 평균 임금이 오를 조짐을 보인다. 일본 최대 노동조합 연합단체인 렌고는 올해 임금협상 지침으로 기본급 3% 인상을 요구해 28년 만에 최고 수준을 표명했다. 유니클로 모회사인 패스트리테일링이 임금을 최대 40% 올리겠다고 발표했고 닌텐도(10%), 산토리홀딩스(6%), 도요타자동차 등도 일제히 임금 인상에 나섰다. 임기 만료를 앞둔 구로다 총재는 금융완화를 끝내는 조건 중 하나로 임금 인상률 3% 달성을 언급한 바 있다. 이른바 ‘통화정책 정상화’로 나갈 여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시장은 여전히 신중하다. 김명중 닛세이기초연구소 주임연구원은 “지금 일본의 임금 인상은 경기 활성화로 기업 이익이 늘어나서가 아니라 정부가 세금 감면 혜택을 주고, 생활물가 상승에 따라 근로자 생활이 어려워져 어쩔 수 없이 올리는 것”이라며 “임금 인상 분위기가 중소기업 전체로 퍼질지, 임금 상승 기조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지 장담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금융정책 정상화를 위한 여건도 여전히 갖춰지지 못했다. 일본의 국가 부채 비율은 262.5%로 세계 최고 수준이고, 국채의 50.3%를 일본은행이 보유하고 있다. 일본에선 기업의 3분의 2가 법인세를 내지 못하는 ‘적자 기업’이다. 금리를 조금만 건드려도 가계, 기업, 정부 3주체의 부담이 다른 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뜻이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며 비정상적 총동원 체제에 나섰던 1940년대 중반 국가 부채 비율이 200% 정도였다. 일본 재무성에 따르면 금리가 1%포인트 오르면 3년 뒤 정부의 국채 이자 부담은 일본 국내총생산(GDP)의 0.7%에 해당하는 3조7000억 엔(약 36조 원) 늘어난다. 일본은 아베노믹스의 짙은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대규모 빚과 저성장의 늪에 빠진 일본 경제의 현실을 남의 일로 보기에는 한국 경제 앞에 놓인 현실도 결코 만만하지 않다.
도쿄=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
한애란 기자 har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