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자들영화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년 간 군만두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복수?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자신을 죽이려 한 보스를 처단하는 복수? 그것도 아닙니다. ‘복수자들’은 복수(複數)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겠다고요? 본캐와 부캐, 양쪽을 오가는 복수자들이 직접 도전과 병행의 노하우를 전해드립니다.
적색과 녹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색각장애 ‘적록색약’을 극복하고 이모티콘 작가가 된 최동석 씨. 카카오톡 이모티콘 ‘찌바’로 큰 인기를 끈 그는 ‘신의 직장’이라 불리는 한국수력원자력 퇴사 후 이모티콘 작가로 전업했다. 최동석 씨 제공
‘알록달록한 세상’을 몰랐던 이가 있습니다. 적색과 녹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색각장애, ‘적록색약’을 안고 태어난 이모티콘 작가 ‘동동작가’, 최동석 씨(28) 이야기입니다. 적록색약은 최근 인기를 끈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의 주인공 ‘전재준’이 앓는 색각장애로도 잘 알려졌습니다. 학창시절 선생님은 그에게 “왜 꽃을 파란색으로 칠하니?”라 물었습니다. “너 이거 무슨 색인지 맞춰봐”라는 친구들의 짓궂은 질문에 상처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림 그리는 일은 절대 직업으로 삼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낙서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림과 일부러 멀리한 건 일찍이 자라난 자격지심의 발로였습니다.
상처와 마주하길 자처한 그의 고집은 2017년 빛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띠였던 닭을 캐릭터화한 ‘콩닭콩닭 코코닭’이 카카오톡 이모티콘으로 통과된 겁니다. 2018년 개띠 해에 만든 ‘찌바’는 더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최 씨가 가장 좋아하는 견종인 시바견을 캐릭터화한 찌바 1탄은 한 달 누적 판매 수 2만 개를 넘었습니다. 그는 이모티콘으로 번 연봉이 한수원 연봉의 2배가 되던 2018년 한수원을 퇴사했습니다. 이모티콘 작가로 전업한 그는 찌바를 8탄까지 출시했고, 이모티콘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신의 직장’을 그만 두고 콤플렉스를 업으로 삼은 동동작가를 ‘복수자들’이 지난달 15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에서 만났습니다. 적록색약을 극복한 그의 노력(https://www.youtube.com/watch?v=TfeCcKdIc1A)과, ‘전업 이모티콘 작가’로 살아남는 방법(https://youtu.be/ECRDQDEMrNk)을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 캡쳐
성공한 이모티콘 작가가 됐지만 원래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림은 그에게 피하고 싶은 콤플렉스였습니다. 어렸을 땐 ‘졸라맨’ 수준의 단순한 그림만 끼적이던 소년이었습니다. 스무 살이 넘어서야 그 콤플렉스를 직시하기로 마음 먹게 됐습니다.
원래 그림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했어요. 취업을 목표로 마이스터고에 진학해 전기를 공부했고, 졸업 후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에서 발전기를 다루는 업무를 했어요. 반복적인 일을 하면서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했고, 교대 근무를 해서 하루를 통으로 쉴 수 있는 날이 생겨 그 시간을 활용해 그림을 배워보기로 했어요. 매해 띠 동물을 캐릭터로 그렸고, 2017년 닭띠 해에 그렸던 ‘콩닭콩닭 코코닭’이 카카오톡 이모티콘으로 통과됐어요. 하루에 150~200개 씩 팔렸는데 너무 신기한 거에요. 취미로만 하던 제 그림을 누군가가 돈 주고 샀다는 거잖아요. 개띠 해였던 2018년에는 시바견을 모델로 한 ‘찌바’를 그렸고, 1탄부터 3탄까지 쭉 카카오톡 이모티콘으로 통과됐어요.
최동석 씨가 2018년 출시한 이모티콘 ‘찌바’. 최동석 씨 제공
―원래 그림에 소질이 있으셨어요?
전혀 아니에요. 오히려 제게 그림 그리는 건 콤플렉스였어요. 초등학교 때 신체검사에서 알게 됐는데 제게 색각장애인 ‘적록색약’이 있었어요. 신호등 색 정도는 구분할 수 있지만 노란색과 황토색처럼 가까운 색들을 붙여 놓으면 구분을 못 해요. 그림도 잘 못 그렸어요. 졸라맨 같은 단순한 그림을 끼적거리던 수준이었죠. 콤플렉스를 극복해보자는 마음으로 미술학원과 컬러리스트 산업기사 자격증 학원을 다니게 됐어요.
컬러리스트 산업기사 자격증은 색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직업을 가지려는 사람들이 따는 자격증이라 아주 미세한 색의 차이도 구분할 줄 알아야 해요. 포기하고 싶었던 적도 많아요. 학원에서 주어진 색을 만드는 실습을 하는데 전 매번 꼴찌였어요. 선생님이 한숨을 쉬며 제 옆을 지나가실 때도 많았고요. 보통 물감 한 세트 다 쓰기도 힘든데 저는 두 세트도 모자랐을 정도로 밤을 새 가며 연습했어요. 처음엔 30% 가까이 되던 오차율을 점점 줄여서 결국 시험에 합격했죠. 합격점수를 가까스로 넘겼지만요.(웃음)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 캡쳐
외면하고 싶은 치부, 모른 척 살아가도 되는 콤플렉스를 직시하기로 한 다짐 뒤에는 유년시절의 상처가 있었습니다. 악의 없이 던진 친구들의 장난, ‘미성숙’을 가장한 차별과 따돌림의 기억과 최 씨는 뒤늦게라도 부딪혀보길 택했습니다.
―적록색약으로 인해 유년시절 상처를 받은 기억도 있으시다고요.
친구들에게 입고 간 옷을 자랑하려고 “이 주황색 옷 예쁘지?”라고 했는데 친구들이 “그거 연두색인데?”라고 한 적이 있어요. 제가 색약이란 걸 알게 된 뒤부턴 애들이 놀다가 갑자기 “너 이거 무슨 색인지 맞춰봐”라고 질문을 던졌어요. 전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 했고요. 그 때 기억이 아직도 상처로 남아있어요. 미술시간도 싫었어요. 선생님께서 “너는 왜 이 색을 썼니?”라고 물어보시는 경우가 있었어요. 저는 빨간색이라고 생각해서 꽃을 색칠했는데 파란색이었더라고요. ‘나는 남들과 다르구나’라는 생각에 많이 위축됐어요.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주인공 전재준도 적록색약을 갖고 있잖아요. 드라마를 보셨을 때 어떠셨어요?
전재준은 학교폭력 가해자라 ‘꼬시다’고 생각했는데요(웃음), 전재준의 친딸인 ‘하예솔’도 적록색약을 앓는 건 많이 안타까웠어요. 특히 꽃을 하얗게, 배경은 파랗게 칠해놓은 장면에서 너무 마음이 아파서 많이 울었어요. 저도 똑같은 상황을 겪어 봤으니까요. 색을 구분 못한다는 이유로 놀림을 받기도 했고, 유년시절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된 적도 있어요. 중학교 때 뒤뜰로 불러서 때리는 아이들도 있었고요. 저도 더 글로리에서 학교 폭력을 당한 주인공 ‘문동은’처럼 ‘내가 얘네보다는 잘 돼야 겠다’는 다짐을 했어요. 그게 동기부여가 돼서 더 치열하게 살아온 것 같아요.
―이모티콘에도 다양한 색이 활용되잖아요. 이모티콘 작가로 일하는데 있어 적록색약이 불편하시진 않나요?
제가 비슷비슷한 색을 구분하지 못해요. 그래서 일부러 정확한 색을 사용하려고 해요. 콤플렉스를 역으로 이용한거죠. 예를 들어 찌바의 색을 정할 때도 애매한 황토색 말고 누가 봐도 정확한 황토색을 썼어요. 색을 잘 보는 친구의 도움을 받기도 했어요. 친구가 조금 더 정확한 색을 골라주면, 그 색을 저장했다가 꺼내 쓰는 방식으로 작업을 해요. 지금은 그 친구와 같이 일하고 있어요. 도움을 받을 사람이 있다면 꼭 그 도움을 받으세요. 시행착오를 겪는 것도 경험이지만 방황의 시간을 줄이는 것도 중요해요.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 캡쳐
콤플렉스를 발판 삼아 치열한 매일을 살아온 그는 이모티콘 작가로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찌바로 한 달에 수 천 만원을 벌기도 했습니다. 이모티콘 수익이 한수원 연봉의 2배가 되던 시점에는 원하는 일에 집중하고자 한수원을 퇴사했습니다. 하지만 ‘꽃길’만 펼쳐진 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퇴사를 했지만 퇴사 직후 10번 넘게 카카오톡 이모티콘 미승인을 받으며 1년 반 동안 ‘강제적 경력단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한수원이 ‘신의 직장’이라 불리는 공기업 중 한 곳이잖아요. 그만 둔다고 했을 때 주변 반대는 없었나요?
어머니의 반대가 심해서 2년 동안 연락을 끊고 지냈어요. 부모님 세대는 자식 잘 되는 게 본인의 자랑이잖아요. 어머니가 친구들에게 ‘우리 아들 한수원 다닌다’고 자랑도 많이 하셨고, ‘아들 하나 잘 키웠다’는 뿌듯함으로 살아가셨어요. 그런데 제가 덜컥 회사를 관둔다고 하니 ‘분명 후회할 날이 올 거다’라며 엄청 말리셨어요. 어머니 고집이 되게 세시거든요. 어머니를 닮아 저도 한 똥고집 하기 때문에 퇴사를 감행했어요. 지금은 화해하고 잘 지내요. 이모티콘으로 번 돈으로 부모님 차도 바꿔 드렸어요.
―‘언젠가 후회한다’던 어머니 말씀처럼 한수원 퇴사를 후회하신 적 있으세요?
있어요. 찌바 3탄까지 승승장구하다가, 퇴사 직후 낸 찌바 4탄에서 첫 미승인의 쓴맛을 봤거든요. 그 후 1년 반 동안 10번의 미승인을 겪었어요. 그 때 대인기피증이 와서 한 달 동안 아무도 안 만났어요. 누군가를 만나면 ‘나 뭐 하는 사람이야’라고 말할 수가 없었어요. 1년 반 동안 돈을 못 버니까 자존감도 많이 떨어졌고요.
카카오톡에서 미승인을 받았던 찌바 4탄. 최동석 씨는 ‘꼬꼬바 찌바’라는 어린 아이 콘셉트에 맞지 않는 모션과 멘트들을 미승인 원인으로 꼽았다. 최동석 씨 제공
―10번이나 미승인을 받은 찌바 4탄을 어떻게 통과시킬 수 있었나요?
처음엔 캐릭터의 매력만으로 승인을 받을 수 있지만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구체적인 콘셉트가 필요해요. 4탄은 ‘꼬꼬마 찌바’라고 해서 아기 찌바를 주제로 했는데 캐릭터 모션이나 멘트가 어른스러운 것들도 포함돼 있었어요. 소품이나 멘트를 더 어린 아이처럼 확고히 해서 통과됐어요. 이모티콘은 콘셉트가 정말 중요해요. 주식, 골프, 수영처럼 내가 관심이 있는 특정 분야를 정하고, 그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이모티콘을 만드는 게 핵심입니다.
―요즘도 이모티콘 작가로 전업한 걸 후회하시나요?
가끔요(웃음). 이모티콘 작가는 프리랜서잖아요. 가만히 있으면 수익이 0이에요. 제가 발로 뛰어서 일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절대 나태해져서는 안 돼요. 그래서 전 이모티콘 전업을 꿈꾸는 분들에게 ‘반드시 부업으로 해라’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요즘 이모티콘 시장 경쟁이 굉장히 치열해요. 1주일에 2000~3000개 100~150개만 출시돼요. 프리랜서가 되면 수익이 불규칙적이라 마음의 여유도 사라지고요. 처음엔 내가 좋아서 시작했는데 돈 때문에 쫓겨서 이모티콘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어요.
그래도 제가 좋아하는 일로 돈과 타인의 인정, 둘 다 얻을 수 있다는 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장점이에요. 내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정체성이 더 확고해졌고, 일에 대한 보람도 한수원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요.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 캡쳐
―적록색약이라는 선천적 장애를 극복하고 그림으로 돈을 버는 전업 이모티콘 작가가 되셨어요. 요즘 콤플렉스를 바라보는 작가님의 마음이 어떤지 궁금해요.
드라마 때문에 적록색약이 화제가 되면서 제가 적록색약이라는 걸 알고 신기해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그 때 새삼 ‘아, 적록색약이 나에게도 엄청난 콤플렉스였지’를 느꼈어요. 한때 제 치부였다는 걸 잊어버렸을 정도로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적록색약 때문에 제가 더 악착같이 살았고, 한계에 도전했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요즘은 오히려 적록색약에 감사해요.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