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100년 전 오늘, 이집트 투탕카멘 무덤이 한국에 처음 소개되다 [청계천 옆 사진관]

입력 | 2023-03-04 11:10:00

백년사진 No.8




▶지난달 [백년사진 No. 7 - 장충동 부녀 살인 현장에 나타난 콧수염의 검은 망토들] 글에 달린 댓글 중에는 우물가서 숭늉을 찾는 독자? 분들의 글이 몇 개 있었습니다. 사건의 결론을 알려달라는 주문이셨죠.

당일 신문에 난 내용은 ‘스트레이트 기사’였습니다. 그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도한 거지요. 다만 한 명의 여성이 사망한 사건을 두고 무려 3꼭지의 기사가 게재된 것으로봐선 당시에 기자들과 국민들이 큰 관심을 가졌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100년 전 동아일보 기자들은 이 사건을 계속 추적했을까요? 후속 보도를 찾아보았습니다.

▶살인사건 현장검증 보도 1주일 후인 후인 1923년 3월 1일자 신문에 아래 내용의 후속 기사가 있었습니다. 아래 내용은 신문 원문을 제가 나름 읽기 쉽게 고치고 띄어서 재작성한 것입니다.

<송정규는 원래 악한 - 자기 누나 동생까지 죽이고자, 시체의 김재유는 죽어서도 시집>

지난 23일 오후 3시에 장충단 공원 남산장 뒤에서 자기의 본처 김재유를 무참히 찔러 죽인 송병우의 둘째아들 송정규(20)는 현장에서 즉시 체포되어 경성 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엄중한 취조를 마치고 예심에 부쳤다 함은 이미 보도한 바이거니와, 원수로 변한 남편의 독한 칼날에 무참히 세상을 버린 김재유의 시체는 그후 서소문통 전중환(田中丸) 병원에서 해부까지 한 후 지난 26일에 그의 시부되는 송병우가 익산으로 운구하여 장사를 하게 되었다. 이에 그 가해자의 평소의 지내던 행동을 다시 듣건데, 그는 겉으로보면 아무 탈이 없는 듯 하나 그 성품은 매우 음독하여 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거스르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음해가 많을 뿐 아니라 죽이고자 하는 마음까지도 두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누이와 아우들에 대하여도 칼로 찍어 죽이러 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였음으로 그 부모되는 자의 감독은 물론이오 비록 남매간이오 형제간이라도 그 아우와 그 형을 대할 때에는 매우 조심을 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피살된 김재유도 여러번 위험한 일을 당하여 오던 바, 작년 12월경에도 면도를 품에 품고 그 아내를 죽이려는 눈치가 있음으로 이 사실을 가해자의 아우되는 송석규가 짐작하고 비밀히 그 사유를 피살자의 가정에 통지하여 김재유의 친부되는 김희 씨는 말하되 ‘나는 음력 설 전에 시골집을 갔다가 어제야 이 소문을 듣고 오늘 나왔습니다. 가해자인 송정규로 말하자면, 그것이 무슨 인종이라 할지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폐일언하고 간단히 말씀하자면, 평일 그와 같은 음독한 성질로 필경은 누구든지 죽이고 제 몸까지 망칠 줄을 짐작한 바인고로 지금 내 자식이 저와 같이 참혹한 죽음을 당한 것도 그리 뜻밖이라 할 수 없습니다. 가해자의 품성이 갈수록 더욱더욱 못되어감으로 생각다 못해 그 친부되는 송병우를 작년 12월에 내 집 ’공평동 48번지‘으로 청하였다가 어찌하면 그 성품을 고치어 사람이 되게 할까하고 사돈간에 의논한 일도 있었습니다. 내가 집을 별로히 떠나지 못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내가 잠깐만 없더라도 만드시 소위 제 계집이라는 것을 불러내이어서 무수히 때리는 일이 많음으로 자연 이런 것을 막기 위하여 별로히 출입을 못하였습니다. 이번에 죽은 것도 내가 없었던 까닭이겠지요. 한편으로 생각하면 불쌍하나 한편으로 또 생각하면 남의 자식 원망할 것 무엇있겠소. 내 자식의 운명관계이니 도로 지금은 아무 일 없는 것 같소이다’하고 말하더라.

▶ 사건 발생 후 2달이 채 안되어 재판이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 검찰은 징역 10년을 구형했고 변호사들은 집행유예를 주장했네요. 1923년 4월 20일 기사입니다.

<송정규는 구형 10년>

지난 3월 23일 오후 3시에 자기 아내를 장충단 공원에서 찔러 죽인 송정규에 대한 공판은 지난 19일 오전에 경성 지방법원에서 삼시(三矢)재판장과 산중(山中)검사가 입회하고 결심하였는데 입회하였던 산중 검사는 징역 10년에 처하는 것이 상당하다 구형을 하고 변호사 리종하(李琮夏) 송본정관(松本正寬) 두 사람은 송정규의 처는 근본부터 내외간에 함께 죽자는 상의가 있었고 또 그 아내가 칼로 찔러 죽일 때에 조금도 저항을 하지 아니한 것을 보면 살인이 아니라 그가 자살하려는 것을 도와준데 지나지 못하니 징역 2년에 처하여 집행유예를 시켜달라고 변론을 하였으며 판결기일은 오는 24일이라더라.

▶동아일보 기자들은 최종 판결까지 사건을 따라갔었네요. 1923년 4월 25일자에 짧은 기사가 실렸는데 송정규는 실형 5년을 선고받았습니다. 너무 우울한 100년 전 사건으로 여러분의 시간을 많이 뺏은 건 아닌가요? 다시 원래의 취지로 돌아와 신문을 뒤적입니다. 제가 옛날 사진을 뒤적이고 여러분에게 소개하는 것은 막연하지만 오늘을 이해하는 또 다른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00년이라는 시간 너머에 있었던 이미지가 오늘 우리 눈 앞의 현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거로 믿고 있습니다.

▶이번 주 신문에서는 “애급 고분에서 파낸 각종 보물” 이라는 기사가 눈에 띄었습니다. 고분을 발굴했는데 거기서 많은 보물이 나왔다는 의미 같았습니다. 컴퓨터의 확대기를 이용해 기사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사실, 저는 농담반진담반으로 만약 사진기자가 되지 않았다면, 고고학자가 되었을거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사무실이 있는 광화문 근처에서 조선시대 집터와 우물터를 발견했다고 하면 왠지 가슴이 뜨겁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외국 여행을 가면 그 나라 박물관을 가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애급(埃及)은 한자로 이집트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100년 전 오늘 신문에 고대 이집트 왕의 무덤을 발굴하는 사진이 실렸다는 사실 만으로도 놀랍습니다. 그런데 이 무덤의 주인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이름은 아니겠죠?

설마… 하는 마음에 기사를 읽어보니, OMG! 투탕카멘의 무덤 사진입니다.

작년 2022년, 발굴 10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대회와 세미나 그리고 전시회 및 출판 등으로 전 세계를 들썩이게 했던 그 투탕카멘 말입니다.

기사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923년 2월 26일자 동아일보 지면입니다.

[이집트 고분 발견. 46척 장신의 황금궤- 애급 고분에서 파내인 옛날 보물의 가지가지]

지난 십구일 ‘애급(埃及)’ ‘룩솔’에서 고대 애급 왕릉을 파내이고 이를 다 기록할 수 없는 보물을 많이 꺼내었는데 그 안에 네자 높이 여섯자 길이 되는 황금 궤짝을 발견하였는데 그 궤짝 안에는 보석으로 꾸민 관곽이 있었으며 그 외에도 동상과 기명이 무수하고 황금으로 장식한 마차도 여러 채를 발견하고 지금까지 세상에서 보지 못한 보물을 다수히 캐내였다 하며 그 발굴 역사의 감독인 ‘칼터’씨의 말을 들어보면, 사진박고 검사하여 보관할 곳으로 보내는 시일이 적어도 2년간을 허비하겠다하며 이번에 그 구경을 갔던 사람 여러 천 명 중에 백이의 황족과 영국 귀족은 일부러 애급까지 갔다더라.

사진은 ‘투탄카멘’ 에급왕의 릉을 발견한 ‘칼터’씨가 오른편에서 토인 역부를 감독하는 광경.



▶ 지난 19일 이집트 고대 왕릉을 파서 많은 보물을 꺼냈는데, 그 중에 네 자 높이, 여섯 자 길이의 황금 관이 포함되어 있었다. 각종 동상과 그릇, 황금 마차 등 희귀한 보물을 꺼냈다. 발굴을 지휘한 ‘칼터’씨에 따르면 보물을 일일이 사진찍고 보관창고로 보내는 데만 2년 이상 걸릴 정도로 양이 많다. 이 광경을 보기 위해 이집트로 몰려 온 수천 명의 외국인 중에는 벨기에의 황족과 영국의 귀족도 있다.

▶과학계에 따르면, 투탕카멘의 무덤이 발굴된 것은 1922년 11월 26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3200년 만의 발굴이라는 어린이과학동아 2022년 11월호 [이달의 과학사-1922년 11월 26일 3200년 만에 발굴! 투탕카멘의 무덤]기사에 따르면

“1922년 이집트의 파라오 투탕카멘의 무덤이 약 3200년 만에 세상에 공개됐습니다. 투탕카멘은 기원전 1332년 9살에 이집트 왕이 된 뒤 18살에 사망했어요. 그동안 아무도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1922년 11월 4일 이 무덤을 발견했지요. 다른 왕들의 무덤과 달리 온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어 당시 왕의 매장 풍습을 알게 해 준 의미 있는 무덤입니다.”

▶ 11월에 발견된 투탕카멘 무덤의 발굴 모습이 한국 신문에 게재된 것은 그로부터 2달 반이 지난 시점이네요. 빛의 속도로 살고 있는 지금의 언론 상황에 비춰보면 너무 늦은 보도라고 해야할까요? 저는 백년 전 게다가 일제시대라는 암흑기에 세계의 문화 유산에 대해 관심을 갖고 뉴스를 전했던 사람들과 그 뉴스를 읽었던 독자들의 마음을 생각해봅니다.

투탕카멘 무덤 발굴 사진은 굴을 파고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10여명의 인부들과 땅 위에서 중절모를 쓴 채 현장을 감독하는 ‘칼터’씨 모습 뿐입니다. 황금마스크 사진을 볼 수는 없지만, 이 장면 만으로도 고대 역사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습니다. 사진 왼쪽 위에 놓여있는 의자는 칼터씨가 현장을 지키기 위해 가져다 놓은 것이었겠죠?



▶ 우연치곤 좀 특별한데요, 투탕카멘 무덤이 발굴된지 100년이 지난 지금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는 “이집트 미라전 -부활을 위한 여정”이라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3월 26일까지인데 저도 어제 금요일에 구경하고 왔습니다. 전시회에는 화강섬록암 재질의 투탕카멘의 좌상도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 옆의 소개글을 옮기며 오늘 포스팅을 마치겠습니다.

“투탕카멘 왕 무덤의 발견 - ‘왕가의 계곡’에 있던 왕의 무덤들은 대부분 고대 때부터 알려져 있었다. 1800년대 후반 ‘왕가의 계곡’에서 집중적인 발굴작업이 이루어진 이후 추가적인 발견은 더이상 없을 것이라 여겨졌지만, 영국의 고고학자인 하워드 카터 (Howard Carter, 1874~1939)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무덤이 있을 거라 믿었고, 부유한 카나본 경의 후원을 받아 조사를 지속했다.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한 채 여섯 시즌이 지나가자 카터는 카나본 경에게 한 시즌만 더 해보겠다고 애원했다.

결국 1922년, 투탕카멘의 무덤이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네 개의 방에서 발견된 5천 점이 넘는 부장품은 양적으로도 , 질적으로도 매우 훌륭했기 때문에 발견은 전 세계를 뒤흔들었고 미디어도 취재에 열을 올렸다. 어떤 저널리스트는 ‘파라오의 저주’라는 뉴스를 퍼뜨리며 무덤을 파헤치는 자들은 금방 죽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워드 카터는 투탕카멘의 무덤에 들어가고 17년이나 지난 후인 1939년, 6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100년 전 기사와 100년 후의 전시장 소개글이 비슷하지 않으세요? 여러분은 100년 사진에서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시선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변영욱기자 cu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