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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윤완준]누가 홍위병을 부추겼나

입력 | 2023-03-05 21:30:00

마오 숭배한 홍위병의 당내 ‘주자파’ 색출
李, 개딸의 ‘수박’ 색출 정말 막을 생각 있나



윤완준 정치부장


“1966년 6월 말이었다. 청두에 있는 우리 학교 교장을 연단에 올려보냈다. 50대 여성이었던 교장은 반동분자 집안 출신이었다. 우리는 교장 머리에 뾰족한 모자를 씌웠다. 학생들이 발길질과 주먹질을 퍼부었다. 교장은 의식을 잃고 연단에 쓰러졌다.”

‘중국을 읽다’ 저자 카롤린 퓌엘은 중국사회과학원 교수의 증언을 전한다. 그는 청두 홍위병 단장이었다. 그해 문화대혁명 속 홍위병의 집단 광기가 중국 전역에 몰아쳤다. 그달 런민일보에 “모든 괴물과 악마를 척결하라”는 논설이 실린다.

마오쩌둥이 1958년 시작한 대약진 운동은 처절한 실패로 끝났다. 마오쩌둥의 리더십은 큰 타격을 입었다. 1961년 류사오치에게 주석 자리를 내주고 2선으로 물러났다. 실패에 대한 솔직한 반성 없이 권력 중심에 다시 서려는 마오쩌둥의 욕망이 문화대혁명을, 홍위병을 불러냈다. 마오쩌둥은 자신을 숭배하던 홍위병들에게 1966년 6월 편지를 보낸다. “반역은 정당하다(造反有理).”

그해 8월 마오쩌둥은 홍위병 완장을 차고 100만 홍위병을 사열한다. 홍위병들은 “마침내 나는 위대한 마오 주석을 만났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며 감격했다.

홍위병들은 표적 색출, 처단에 나선다. 공산당 내 자본주의 노선 추종자, 부르주아 지식인 등이었다. 수배 전단이 등장했다. 프랑크 디쾨터가 쓴 ‘문화대혁명’에 묘사된 실상은 공포스럽다. 곤봉과 채찍으로 구타했다. 머리에 불을 질렀다. 작두칼로 사람을 죽였다. 철사로 목 졸라 죽였다. 유명 작가 라오서는 여학생 수십 명에게 맞아 사망했다. 그의 옷 주머니에 마오쩌둥 시집이 있었다.

문화대혁명 초기 반당 분자 색출에 앞장섰던 왕광메이. 그는 류사오치의 부인이었다. 그조차 1967년 4월 홍위병 여학생들에 의해 공개처단(批鬪) 대상이 됐다. 홍위병들은 하이힐을 신기고 몸에 꽉 끼는 치파오를 입혔다. 탁구공으로 만든 목걸이를 걸게 하고 모욕했다.

광분한 홍위병들의 대규모 폭력으로 체제 자체가 위협받는 수준에 이르렀다. ‘옥스퍼드 중국사 수업’ 저자 폴 로프는 “마오쩌둥이 홍위병이 초래한 대혼란을 묵묵히 지켜만 봤다”고 지적했다. 2년 뒤인 1968년에야 마오쩌둥은 홍위병이 너무 멀리 갔다며 해산을 명령한다. 류사오치와 부주석 덩샤오핑을 몰아내고 다시 당을 장악한 뒤였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강성 지지층 ‘개딸’들이 ‘수박’ 색출에 나섰다. ‘겉은 민주당, 속은 국민의힘’이라는 은어다. 홍위병 시절로 보면 공산당 내 자본주의 노선 추종자다. 문재인 전 대통령과 이낙연 전 대표를 ‘수박 7적’이라 지목하는 이미지가 등장했다. “국민의힘과 내통해 이재명 대표를 팔아넘기고 윤석열 정권을 창출한 첩자들을 직접 꾸짖어 처단하자”고 주장한다.

지난해 대선 패배 직후에도 이 대표는 ‘개딸’들에게 “고맙고 사랑한다”며 적극적이었다. 이 대표가 또다시 정치적 위기에 빠진 지금 강경파 친명(친이재명)계 의원들은 강성 지지층 당원들을 부추기는 각종 주장을 쏟아낸다. 이 대표는 4일에야 페이스북에 “내부를 향한 공격이나 비난을 중단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사법 리스크를 둘러싼 우려와 불신엔 제대로 응답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한 솔직한 답변 없이 강성 지지층들의 공개처단 흉내 내기가 없어질 수 있을까.


윤완준 정치부장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