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강진 현장 파견 ‘콧등 밴드’ 김혜주 간호장교
한국긴급구호대 소속으로 튀르키예 지진 피해 복구를 위해 파견됐던 국군대전병원 김혜주 대위를 지난달 23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사에서 만났다. 그는 “생사가 엇갈리는 현장에서 돌아오니 따뜻한 집과 물이 나오는 샤워기, 스위치를 누르면 켜지는 전등 등 모든 사소한 것이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지난달 18일 튀르키예 강진 피해 현장에 파견돼 생존자 수색·구조 활동을 벌였던 한국 긴급구호대가 아다나 공항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예고에 없던 “한국팀이 귀국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오더니 공항에 있던 튀르키예 국민들이 긴급구호대원을 둥글게 둘러싸고 박수를 쳤다. 왼손을 가슴에 올리는 튀르키예 감사 인사를 하거나, 부랴부랴 기념품을 사와 건네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 자리에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절정일 때 대구로 파견됐던 국군대전병원 소속 김혜주 대위(32)도 있었다. 당시 방역 마스크를 오래 쓰다 보니 콧등이 헐어 반창고를 붙인 김 대위의 모습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공개됐고, 코로나19로 지친 국민들은 그를 보고 용기를 얻었다. 지난달 23일 인터뷰차 만난 김 대위에게 재난 현장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부터 물었다.》
―대구 코로나19병원에 이어 튀르키예 구조 활동도 자원했다.
―가족들의 걱정이 컸을 것 같다.
“병원에서 짐을 싸서 바로 공항으로 갔다. 카카오톡으로만 가족에게 알렸다. 이튿날 튀르키예 공항에 도착해 보니 ‘갑자기?’ ‘진짜로?’ 하는 메시지가 도착해 있더라. 가족이 말릴 시간도 없었다. 다만 항상 마음의 준비를 당부한다. ‘엄마, 우리는 전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이에요. 언제 전쟁이 날지 모르고, 언제 죽을지도 몰라요. 그렇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라고 한다. 그래도 엄마는 TV에서 튀르키예 현장을 보며 9일 내내 우셨다고 한다. 처참한 피해 현장을 보고 ‘우리 딸 괜찮을까’ 걱정이 되어서…. (담담한 김 대위 눈가로 잠시 눈물이 차올랐다) 집에 왔더니 ‘무사히 돌아왔으니 됐다’며 소고기를 구워 주셨다.”
―실제로 본 튀르키예 지진 현장은 어떠했나.
“11시간 비행 끝에 가지안테프 공항에 내렸다. 안전한 곳에 베이스캠프를 차리려고 이동하는데 도로가 망가진 상태라 차가 기어가듯 움직였다. 튀르키예 남부 하타이주 안타키아 현장은 건물이 마치 쿠크다스 과자가 부스러진 것처럼 보였다. 과연 사람이 깔려 있을 공간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위태롭게 남은 건물도 가스, 수도, 전기 등이 모두 끊겨 있었고 가스가 새어 곳곳에 화재가 났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집을 잃고, 추위와 싸우고 있었다. 가족이나 친구를 찾아 흐느끼며 거리를 헤매는 사람이 많았다. 이산가족도 많다. 수습한 시신은 한곳에 뉘어 드렸는데…. 신분증이 없으면 누군지 확인이 어려워서 이름 모를 주검이 많았다. 부모를 잃기도 하고, 아이를 잃기도 하고…. 전쟁이 난 것처럼 오랫동안 상처가 남을 것 같다.”
―여진이 계속돼 고등학교에 겨우 베이스캠프를 차렸다고 들었다.
―구조 활동 중에 가장 안타까웠던 순간은 언제였나.
“구조 활동 첫날 5명의 생존자를 구출했다. 그중에 손이 구조물에 끼여 건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엄마가 우리를 보자 방 안에 남아 있는 아이부터 구조해 달라고 애원했다. 엄마는 손을 많이 다쳤는데도 아이 생각에 아픈 줄도 모르더라. 엄마 요청에 따라 아이를 구하러 갔지만 이미 숨진 뒤였다. 엄마가 절규하는 모습을 보며 눈물이 쏟아졌다. 감히 위로의 말도 건넬 수 없었다.”
―6·25전쟁에 참전했던 튀르키예와의 ‘형제의 정’이 감동을 줬다.
“베이스캠프를 차리려 이동하는 중간에 튀르키예군 위병소에 들렀다. 한국군인데 화장실을 쓸 수 있는지 물었더니, 화장실도 개방해주고 식사도 내어줬다. 만나는 튀르키예군마다 항상 웃어주고, 감사 인사를 건넸다. 할아버지가 6·25전쟁에 참전해 한국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는 주민이 다가와 ‘고맙다’며 인사를 하기도 했다. 가는 곳마다 튀르키예 국민들이 보여준 따뜻한 ‘형제의 정’은 구조 활동 내내 힘을 북돋아 줬다.”
―2020년 대구 코로나19 사태 당시 ‘콧등 반창고’로 화제가 됐다.
2020년 코로나19 확산 당시 ‘콧등 밴드’를 하고 방호복을 입은 김혜주 대위. 국방부 제공
―방호복보다도 예쁜 옷을 입고, 사투의 현장보다는 좋은 곳에 가고 싶을 나이인데….
“20대 초반에는 저도 그랬다. 간호사 생활을 하는 11년 동안 삶과 죽음, 그 경계의 순간을 많이 봤다. 그러면서 ‘언제 죽음을 맞을지 모른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맞을까’ 스스로에게 묻게 됐고 ‘건강하게 움직일 때 의미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답에 이르렀다. 무기력에 빠지기보다는 따뜻한 집, 사랑하는 가족, 씻을 수 있는 샤워기의 물, 스위치를 누르면 켜지는 전등 같은 사소한 것에 감사하며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하곤 한다.”
―어떻게 간호장교의 길을 걷게 됐나.
“어릴 적부터 군인이 되고 싶었다.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다가 그 꿈을 이루고 싶어 간호장교로 임관했다. 간호장교는 전시도, 평시도 부상자를 돌볼 수 있도록 훈련을 받기 때문에 재난 상황에서 대처가 가능하다. 이번 튀르키예 구조 활동 중에 건물 더미에 하반신이 깔린 주민이 있었다. 갑자기 움직일 경우 전해질 불균형으로 심정지가 올 수 있다. 꺼내기 전에 수액을 공급해 줘야 한다. 문제는 너무 비좁아 남자가 들어갈 수 없었다. 체구가 작은 동료 간호장교가 포복으로 기어 들어가 휴대전화 불빛에 의존해 수액 바늘을 꽂았다. 결국 살려서 병원으로 이송했다.”
―재난 현장은 남을 구하려다 내가 위험해질 수 있다. 그래도 갈 것인가.
“갈 것이다. 지진이 일어나 내가 매몰됐을 때 팔과 다리 다친 게 무서울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못 찾을 것 같은 공포가 더 무서울까 생각해 봤다. 누군가 나를 찾아주기를, 그래서 살 수 있기를 바랄 것 같다. 힘들어도 구조 활동을 쉴 수 없던 이유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다시 갈 것 같다.”
―군인으로서의 직업정신인가, 원래 이타적인 사람인가.
“한국행 전날 동갑내기 튀르키예 여성을 호텔서 만났다. ‘도와주러 와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더라. 집도, 가족도 모두 잃어서 호텔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그런 슬픔 속에서도 연신 고맙다고 하기에 ‘70년 전에 튀르키예도 한국을 도왔다. 우리가 돕는 게 당연하다’고 했다. 그랬더니 ‘한국이 지진을 겪었어도, 우리는 다시 도왔을 것’이라고 답하더라. ‘나라 대 나라’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돕는다는 보편적인 인류애 같은 의미였다. 그런 비슷한 느낌이다. 긴급구호대 사이에서도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공감대가 있어 힘듦을 견딜 수 있었다. 누군가를 돕는 뿌듯함이 힘듦을 잊게 한다.”
김혜주 대위(32)△2014년 육군전문사관 16기 임관
△2015∼2017년 육군 제35보병사단 신병교육대대 간호장교
△2017∼2019년 육군훈련소 지구병원 응급간호장교
△2019∼2021년 국군춘천병원 내외과간호과 응급간호장교
△2020년 2∼4월 코로나19 대구 감염병전담병원 파견
△2022년∼ 국군대전병원 내과간호과 중환자선임간호장교
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