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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일으킨 국가의 국가대표 선수들[글로벌 이슈/신광영]

입력 | 2023-03-08 03:00:00

올 1월 호주오픈 여자 테니스 단식에서 우승한 벨라루스의 아리나 사발렌카 선수. 그는 주최 측이 러시아·벨라루스 선수들에게 국기 표출을 금지한 것에 대해 “우리는 운동선수일 뿐인데 왜 정치와 연관돼야 하느냐”며 항변했다. 사진 출처 사벨렌카 트위터

신광영 국제부 차장


올 1월 28일 열린 호주오픈 여자 테니스 결승전 승자는 벨라루스의 아리나 사발렌카 선수(25)였다. 그의 첫 메이저대회 우승이다. 사발렌카의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TV 중계방송 화면에는 그의 이름만 뜰 뿐, 이름 옆에 있어야 할 국가 표시가 없었다. ‘국기 표출 및 국가 연주 금지’는 국제테니스연맹이 러시아와 벨라루스 선수들에게 출전을 허용하며 내건 조건이었다.

사발렌카는 결승전에 앞서 이런 인터뷰를 했다. “우리는 그냥 운동선수일 뿐이에요. (전쟁을 멈추기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하겠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우리가 왜 정치와 연관돼야 하는 거죠.”

또 다른 메이저 대회인 지난해 7월 영국 윔블던 대회에 그는 출전하지 못했다. 주최 측이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며 러시아와 동맹국 벨라루스 선수의 출전을 금지했다. “우리가 윔블던 출전을 금지당한 이후 바뀐 게 있나요? 아무것도 없어요. 러시아는 여전히 전쟁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 상황이 슬픈 거예요.”

사발렌카가 호주오픈에서 우승하기 5일 전, 우크라이나 남자 피겨스케이트 선수의 비보가 전해졌다. 드미트로 샤르파르(25)가 우크라이나 동부 격전지인 바흐무트에서 러시아군과 교전 중 전사했다. 샤르파르는 우크라이나 챔피언십에서 은메달을 딴 유망주였다. 우크라이나 육상 선수 볼로디미르 안드로슈크(22)도 며칠 뒤 바흐무트에서 전사했다. 국가대표인 두 선수는 입대 의무가 없지만 자원입대를 택했다. 전쟁 이후 참전하거나 폭격 등으로 사망한 우크라이나의 국가대표급 선수와 코치는 220명에 달한다. 경기장과 체육관 수십 곳도 폭격에 무너졌다.

동갑내기인 사발렌카와 샤르파르는 세계무대에 서기 위해 각자의 훈련장에서 땀흘려 온 정상급 선수들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한 사람을 출전이 금지된 선수로, 다른 한 사람을 출전이 불가능한 선수로 갈라놓았다.

내년 7월 파리 올림픽을 앞두고 세계 스포츠계는 두 개로 갈라져 있다. 당장 이번 봄부터 올림픽 예선이 치러지는데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러시아·벨라루스 선수들의 출전을 허용하기로 했다. 그러자 우크라이나가 “대회를 보이콧하겠다”며 강하게 반발했고 한국과 미국 등 34개국이 우크라이나 편에 섰다.

눈에 띄는 것은 러시아의 침공을 비판해 온 유엔인권이사회(UNHCR)가 러시아·벨라루스 선수들의 올림픽 출전을 옹호하고 나선 점이다. “운동선수가 어느 나라 여권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차별받아선 안 된다. 전쟁으로 인권이 노골적으로 무시될 때 인종·성별·국적에 따른 차별을 배격한다는 더 큰 의미의 인권 규범이 존중돼야 한다.”

선수의 재능과 땀에 대한 보상이 출신 국가에 따라 달라져선 안 된다는 논리는 일리가 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선수들 역시 그들의 여권 때문에 살해당했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판단이 쉽지 않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복싱 금메달리스트인 우크라이나의 올렉산드르 우식은 “러시아 선수들이 따낸 메달은 피, 죽음, 눈물의 메달이 될 것”이라고 했다.

IOC는 이런 반발을 고려해 중립국 선수 자격으로만 출전할 수 있다는 단서를 달긴 했다. 하지만 형식적 제약에 그칠 수밖에 없다. 사발렌카 선수는 호주오픈 우승 직후 “(고국) 사람들이 나를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국기 표시가 없어도) 모두가 내가 벨라루스 선수라는 것을 안다. 그럼 된 거다”라고 했다. 우리가 그동안 여러 올림픽에서 봐왔듯 ‘ROC(러시아 올림픽위원회)’ 표식을 달고 나오는 선수들이 러시아 선수임을 누구나 알아볼 것이다.

러시아는 자국 선수들이 세계 최대 스포츠 무대에서 선보이는 활약상을 이용해 내부 결속을 다지고 전 세계를 상대로 정치 선전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는 2014년 소치 겨울올림픽을 치른 직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점령했고, 지난해 2월 베이징 겨울올림픽 폐회식 4일 뒤 보란 듯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러시아의 대외 정책에서 올림픽 정신은 설 자리가 없었다. 독일 나치가 1936년 전 세계의 반대 여론에도 베를린 올림픽을 개최하며 국력을 정비해 3년 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것과 다르지 않다.

파리 올림픽에 출전할 우크라이나 선수들은 선수이기 이전에 전쟁 생존자이기도 하다. 이들에게 가해국 선수들과 마주해야 하는 아픔을 느끼게 해선 안 된다. 물론 전쟁을 일으킨 국가의 잘못 때문에 그 나라 국가대표 선수들이 4년간 기다려온 기회를 빼앗기는 것은 여전히 안타까운 대목이다. 선수들이 흘린 땀의 가치를 증발시킨다는 점에서도 전쟁의 야만성은 드러난다.


신광영 국제부 차장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