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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과근로 적립해 한달휴가, 그림의 떡”… 정확한 근로시간 기록과 관리가 관건

입력 | 2023-03-09 03:00:00

[근로시간 개편안 실효성]
‘주 69시간 근무’ 우려와 대안




정부가 6일 근로시간 개편안을 입법 예고한 가운데 근로자들 사이에서 파장이 상당하다. 주당 최대 근로시간이 현재의 52시간에서 최대 69시간까지 늘어날 수 있게 되면서 장시간 근로가 더 심해질까 걱정된다는 것이다. 야간, 휴일, 연장 근로시간을 적립했다가 휴가로 쓸 수 있게 하겠다는 ‘근로시간저축계좌제’ 도입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다. 동아일보는 전문가들로부터 근로시간 개편안의 실효성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을 들어 봤다.



① “주 69시간까지, 근로시간 길어질 것”→근로자대표제 정비해 근로시간 남용 방지
고용노동부는 현재 주(週) 12시간으로 제한돼 있는 연장 근로시간을 월, 분기(3개월), 반기(6개월), 연 단위로도 관리할 수 있도록 한 근로시간제 개편안을 6일 발표했다. 주 52시간제를 유연하게 적용해 최대 주 69시간 근무까지 가능해진 것이다.

이를 두고 주요 직장인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전체 근로시간이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가 이어졌다.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 넥슨지회 배수찬 지회장은 “현재 많은 게임 개발자들은 특정 시기에 일을 몰아서 해야 하기 때문에 이미 선택근로제(근로자가 한시적으로 근로일, 출퇴근 시간 등을 유연하게 정할 수 있는 제도)를 이용하고 있고, 일이 없을 때는 주 20시간 정도만 일하기도 한다”며 “회사가 지금 와서 선택근로제 대신 연장근로제를 도입하면 일이 많아도 최대 69시간을 넘겨 일할 수 없고, 일이 없어도 최소 40시간(법정근로시간) 근로를 채워야 해 근로시간이 되레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고용부는 “새로운 근로시간제를 도입할 때 반드시 근로자 대표와 사용자가 서면 합의를 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장시간 근로자에 대한 우려가 커지자 국민의힘 성일종 정책위의장은 7일 “분명한 것은 노사 간에 합의가 안 되면 이 제도를 운영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정작 근로시간을 결정해야 할 근로자 대표의 정의와 역할, 선출 절차에 대해서는 현재 규정된 것이 없다. 이 때문에 오히려 대표성 없는 근로자나 노동조합이 다수 근로자의 의견에 위배되는 근로시간제를 결정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는 조만간 다양한 직군의 근로자 의견을 반영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해 발표할 예정이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민주적으로 정당성을 갖는 근로자 대표 선출은 근로시간제 개편의 선제조건”이라고 말했다.



② “근로시간 적립해 장기 휴가? 불가능”→정확한 근로시간 기록, 관리가 선제조건

이번 개편안에선 초과 근로시간을 휴가로 적립하는 근로시간저축계좌제도 도입됐다. 정부는 ‘일할 때 몰아서 일하고, 쉴 때 몰아서 쉬도록’ 하겠다고 했지만 노동계에서는 정부의 의도와 다른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지금도 상사 눈치가 보여서 휴가를 못 가는데 ‘제주 한 달살이’ 같은 장기휴가는 ‘그림의 떡’”이라는 부정적인 의견이 이어졌다. 온라인에는 ‘주 69시간 근로’를 가정한 가상 근무표까지 등장했다. 월∼금요일 내내 오전 9시부터 다음 날 오전 1시까지 근무-점심시간-근무-저녁시간이 이어지다가 토, 일요일에는 ‘기절’, ‘병원’, ‘집안일’ 등으로 채워진 시간표였다.

다소 과장됐더라도 실제 근로자 휴가 사용률을 보면 우려할 만한 부분이 있다. 2021년 문화체육관광부 조사 결과 17개 시도의 ‘상용근로자 5인 이상 사업체’에 근무하는 근로자 5580명의 연차 휴가 사용률은 76.1%에 불과했다. 현재도 초과근로를 하면 보상휴가를 받을 수 있는 제도(보상휴가제)가 운영 중이지만 이 이용률도 낮다. 특히, 노동조합이 없거나 미약한 중소 규모 사업장의 경우 사측이 연장근로에 대해 수당 지급 대신 근로시간저축을 전면 도입하고 실제로는 휴가를 허락하지 않을 경우 임금만 줄어드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초과 근로시간을 적립해 보상휴가로 전환할 수 있는 제도가 실질적으로 잘 운영되려면 구체적인 운영기준이 세워져야 하고, 무엇보다 근로시간을 정확히 기록·관리하는 시스템이 관건”이라고 말했다. 일본, 독일, 프랑스 등 주요 선진국들은 사용자로 하여금 근로시간을 의무적으로 기록하고 이를 2년에서 3년간 보관하도록 하고 있지만 한국에는 그런 의무가 없다.


③ “근로시간 유연화는 시기상조”→MZ 근로문화 확산, 제도 바꿔 대비해야

현재 한국의 근로 현실을 감안할 때 개편안이 시기상조라는 지적도 나온다. 고용부가 이번 개편안에 참조했다는 유럽의 경우 프랑스, 영국, 독일의 주 최대 근로시간은 48시간에 불과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밝힌 독일의 지난해 연간 근로시간은 1349시간으로 한국보다 500시간 이상 짧다. 이렇듯 유럽과 비교해 장시간 근로가 일상적인 한국에서 연장근로시간 단위를 섣불리 확대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박 교수는 “노동환경이 바뀌었고 근로자마다 원하는 근무 스타일도 다르다. 그런 선택을 반영할 수 있는 유연한 방향으로 가는 정책은 불가피하다”며 “앞으로 MZ세대가 대거 노동시장에 유입되면 이런 근로문화는 더욱 확산될 것이기 때문에 지금부터 제도도 바꾸며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김예윤 기자 yea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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