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1509∼1511년)에 등장하는 유클리드와 제자들의 모습. 근원적 질문에 관해 묻고 답하는 과정이야말로 인간과 자연 세계의 본성에 접근하는 길이다. 엠페도클레스는 4원소의 결합에 대해 질문했고 다윈 진화론의 아이디어도 찾아냈다. 대화형 인공지능의 시대에 문답의 힘은 더 중요해질 것이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질문은 잠든 생각을 흔들어 깨운다. 질문이 대답을 낳고 대답이 다른 질문으로 이어지면서 처음에 엉성했던 생각도 촘촘한 짜임새를 갖춰 나간다. 세상의 철학, 문학, 과학, 기술은 물론이고 음악과 미술 같은 예술적 창작까지 그 어느 것도 질문의 씨줄과 대답의 날줄로 엮인 직조물이 아닌 것은 없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과 대답이 없었다면, 호모 사피엔스의 문명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문명을 이끈 사람들은 질문을 잘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질문과 대답에 아주 능한 사람들이었다. 독특한 문화 덕분이었다. ‘입 닥쳐, 네가 뭘 안다고…’같이 윽박의 한마디로 질문을 막아버리는 권위주의도, ‘쓸데없는 질문 하지 마!’라는 실용주의도 그리스 문화에서는 발붙일 수 없었다. 지혜를 좋아했던 사람들은 공리공론을 낳을 것 같은 질문도 물리치지 않았다. 그런 풍토였기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같이 공허해 보이는 파르메니데스의 질문도 살아남았다. 또, 그 질문에 대해 되묻고 대답을 찾아낸 철학자들 덕분에, 후대 서양 과학의 모태가 된 그리스인들의 자연 철학도 생겨날 수 있었다. 엠페도클레스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질문과 답 이어가며 본성 탐구
엠페도클레스가 던진 첫 질문은 파르메니데스의 질문과 같았다.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지만 그의 대답은 파르메니데스의 그것과 달랐다. 파르메니데스가 여신의 권위를 빌려 있는 것의 본성을 선포했다면, 그는 주변에 널려 있는 것들을 관찰했다.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수많은 자연물이 널려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은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하지만 생겨남과 사라짐 속에 있는 것들 사이에 변함없이 있는 것들이 있었다. 엠페도클레스에게는 흙, 물, 불, 공기가 그랬다. 나무도, 동물도, 사람도 모두 이 네 가지 물질에서 시작해서 생겨났다가 결국 그것들로 돌아가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네 가지 것들이 원소들로서 있고 나머지는 그것들이 합쳐지거나 해체됨으로써 생겨나고 사라진다.
두 번째 질문이 이어졌다. 자연의 만물이 흙, 물, 불, 공기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모두 똑같다면, 자연물들 사이의 차이는 어디서 올까? 엠페도클레스는 수(數)의 질서에 대한 피타고라스의 생각을 떠올렸다. ‘그래, 모든 것을 이루는 물질들이 똑같아도, 그것들의 결합 방식이 다르면 서로 달라지지.’ 예를 들어 살과 뼈를 이루는 원소들은 모두 같다. 하지만 흙, 물, 불, 공기가 ‘2 : 2 : 2 : 2’의 비율로 결합하면 살이 되고, 똑같은 원소들이 ‘2 : 0 : 4 : 2’로 결합하면 뼈가 된다. 기본적 원소들의 결합을 통해서 더 높은 수준의 복합체를 설명해 내는 사고방식, ‘원형적 화학(proto-chemistry)’이 그렇게 출현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엠페도클레스에게 세 번째 질문이 떠올랐다. ‘그렇게 모든 자연 현상이 네 가지 원소의 결합과 해체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그것들을 결합하고 해체하는 힘은 또 어디서 올까?’ 원소들 사이에서 결합의 힘과 분리의 힘이 작용해야 하지 않을까? 그는 그런 힘을 ‘사랑’과 ‘미움’에서 찾았다. 사랑이 묶고 미움이 떼어 놓는다. 신화적인 세계관의 잔재가 아직 남아 있지만, 그는 어쨌든 끌어당기는 힘과 미는 힘, 즉 인력과 척력의 우주적인 힘을 생각해 냈다.
‘사람 머리, 소의 몸’ 괴물 왜 없나
오스트리아 빈 자연사 박물관의 엠페도클레스 석상(프리드리히 베어 작).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질문과 대답의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혼자서 질문하고 대답하는 ‘사색’, 둘이서 질문하고 대답하는 ‘대화’, 여럿이 모여 질문하고 대답하는 ‘토론’이 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는 또 다른 질문과 대답의 방식이 있다. 인간이 질문하고 AI가 대답하는 채팅의 방식이다. 이런 대화의 특징은 질문자가 항상 사람이라는 데 있다. 우리가 얼마나 질문을 잘 던지는지에 따라 대답의 질이 달라진다.
챗GPT가 답하기 힘든 질문들
새해 들어 챗GPT 때문에 세상이 들썩이기에 나는 이런 질문을 던져 보았다. “챗GPT가 가장 대답하기 힘든 질문은 뭘까?” 챗GPT의 대답은 이랬다. “챗GPT가 가장 대답하기 힘든 질문은 일반적으로 기계학습 모델의 한계와 관련된 질문입니다. 예를 들어, 챗GPT는 주어진 문맥과 데이터를 기반으로 답변을 생성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질문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지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복잡하거나 철학적인 문제, 인간의 감정이나 도덕적 판단 등과 같이 인간의 주관적인 판단이 필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챗GPT가 적절한 대답을 제공하기 어렵습니다.”
내게 챗GPT의 대답은, 진짜 인간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가리키는 아폴론의 신탁처럼 들린다. 인간의 모든 질문은 복잡하고 철학적인 질문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감정이나 도덕적 판단 없이 인간은 살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일에서 챗GPT가 질문도 하지 않고, 적절한 대답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결국 인간에게 남는 일이 아닌가? AI 기술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인간의 인간됨을 위한 교육, 인간만이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잘할 수 있게 하는 교육이 더욱더 필요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