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혁명선언 100년 맞아 재조명 “단재, 붓과 검 사이 갈등하던 인물”
“패군지장(敗軍之將) 망국지민(亡國之民)으로 이미 세상에서 버림을 받은 지 오랜 저는 십 년간을 정처 없이 방랑하여 뱁새같이 잠자고 두더지같이 마시면서 구차히 쇠잔한 목숨을 보전하고 있습니다. 분연히 일어나 붓을 내던지고 몇몇 열사와 함께 나라를 위해 죽음으로써 적과 싸우기를 기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하고, 어느덧 천한 나이 사십이 지났습니다.”
신채호가 쓴 조선혁명선언 100주년을 맞아 학계에서 선언의 배경과 의의가 재조명되고 있다. 선언은 일본의 ‘강도정치’가 ‘2000만 조선 민중’의 생존권과 자유를 유린·말살해 왔고, ‘민족 생존’을 유지하려면 “혁명 수단으로 강도 일본을 살벌(殺伐)”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단재는 무장 전투가 자신과 같은 글쟁이(유생·儒生)에게 맞는 일인지 고민하기도 했다. 1922년 지은 시 ‘가을밤 회포를 적음’에서는 “무디어진 붓을 들고 청구(靑丘) 역사 끄적이네”라며 ‘검’을 버리고 ‘붓’으로 돌아온 회한을 노래했다. 도 교수는 “단재는 늘 ‘붓’과 ‘검’ 사이에서 갈등했고, 검이든 붓이든 투쟁을 찬양했다”고 설명했다.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의 단장 김원봉(1898∼1959)이 단재를 찾아온 건 단재가 이 같은 글을 쓴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22년 12월이다. 김원봉은 실의에 빠졌던 단재를 찾아와 선언문 작성을 요청했고, 마음을 다잡아 글을 쓴 단재는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을 1923년 1월 28일 발표했다.
김기승 순천향대 국제문화학과 명예교수는 ‘월간순국’에 기고한 글에서 “신채호는 1919년 3·1운동 이후 임시정부 활동에 대한 불만을 느끼고 ‘의열 투쟁’의 가능성을 발견했다”면서 “조선혁명선언에서 민중은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폭력적 실천으로 스스로 각성되는 민중혁명의 주체로 선언됐다”고 설명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