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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이 정체성이자 자부심? 프랑스 왜 이리 난리인가[딥다이브]

입력 | 2023-03-11 08:00:00


연금개혁 법안을 둘러싼 갈등 때문에 프랑스가 보통 난리가 아니란 소식 들어보셨나요? 노조의 역대급 시위로 열차가 멈추고, 교실 문을 닫고, 발전소 가동이 일부 중단되기까지 했는데요. 혹시 이런 생각은 안 드시나요? ‘연금개혁이 정말 큰 이슈이긴 하지만 저렇게까지 할 정도인가.’

그런 궁금증을 갖고 있던 차에 뉴욕타임스에서 이런 제목의 기사를 봤습니다. ‘프랑스에서 은퇴를 둘러싼 싸움은 정체성의 문제이다’. 정체성? 그냥 더 오래 일하기 싫어서 연금개혁에 반대하는 건 줄 알았는데, 왜 거창하게도 정체성까지 거론될까요. 오늘 딥다이브는 프랑스의 연금개혁을 둘러싼 갈등과 그 배경을 깊이 들여다보겠습니다.

7일 프랑스 전국적으로 8개 노조의 대규모 연금개혁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프랑스를 멈춰버리자’는 시위대 구호대로 이날 프랑스는 마비되다시피 했다. 노조는 11일에도 총파업을 계획 중이다. 파리=AP 뉴시스

*이 기사는 10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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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멈춰버린 역대급 총파업
128만명 vs. 350만명.

3월 7일 전국적으로 열린 노동자들의 연금개혁 반대 시위 참여자 수를 놓고 프랑스 정부와 노동조합 측이 각각 내놓은 추정치입니다(양측 추정치가 크게 차이 나는 건 한국이나 프랑스나 마찬가지네요). 확실한 건 뭘 기준으로 하든 이날이 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 사상 최대 규모 시위였다는 겁니다. (이전 최대 규모는 올해 1월 31일 열린 연금개혁 반대 시위. 당시는 정부 추산 127만명, 노조 추산 250만명.) 르몽드가 “연금개혁 반대 시위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평가했을 정도인데요.

이날 시위대의 구호는 “프랑스를 멈춰버리자”. 실제 7일 프랑스는 마비되다시피 했습니다. 대중교통 노동자, 트럭 운전사, 원자력 발전소 기술자들 중 상당수가 파업에 들어갔고요. 초등학교 교사의 3분의 2와 공무원 4분의 1이 파업을 했습니다. 프랑스 국영 철도는 예정된 열차의 4분의 3을 취소했고, 항공편 역시 약 3분의 1이 취소됐죠. 심지어 발전소 직원 중 절반이 파업에 들어가면서 전기 생산량이 평소의 5분의 1로 줄어들어서 이웃국가에서 전기를 수입해야 했습니다. 때로 과격해진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최루탄과 섬광탄을 쏘기도 했죠.


7일 리옹에서 열린 연금개혁 반대 시위에서 시위대가 행진하는 모습. 리옹=AP 뉴시스




프랑스 노동조합들은 토요일(11일)에 더 큰 시위를 예고했는데요. 강경파 노조인 CGT의 필립 마르티네즈 대표는 “우리는 더 높은 기어로 가고 있다”며 투쟁의지를 밝혔습니다.

노조 측이 투쟁 강도를 높이는 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정부의 연금개혁 법안은 현재 국회에서 논의 중입니다. 이번주 일요일(12일)까지 상원이 심의를 마치고, 이르면 다음 주 국회 표결에 부쳐질 예정이죠.

법안의 골자는 현재 62세인 법적 정년(최소 연금 수령 나이)를 64세로 높이는 것. 한꺼번에는 아니고, 매년 석 달씩 수급 연령을 높여서 2030년에 64세까지 올리겠다는 계획인데요. 또 지금은 연금을 완전히 받으려면 기여기간(일하면서 연금을 낸 기간)이 42년이면 되지만 이를 43년으로 늘리는 내용도 포함됩니다. 한마디로 ‘더 오래 일하고 더 늦게 연금을 받으라’는 겁니다.





비호감 대통령의 연금개혁 승부수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지난해 4월 재선에 성공한 그가 만약 연금개혁 법안 국회통과에 실패한다면 자칫 연임 1년 만에 레임덕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파리=AP 뉴시스




이거 왠지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지 않나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비슷한 상황이 2019년 말에도 있었습니다. 그때도 에마뉘엘 마크롱이 프랑스 대통령이었고, 그의 연금개혁안(42개 퇴직연금을 하나로 통합하는 안)에 반대한 노조가 대대적인 총파업에 나섰죠. 그리고 결론은? 2020년 초 코로나를 이유로 그 개혁안은 일단 보류했습니다.

이후 3년 여 만에 다시 마크롱 대통령이 연금개혁을 들고 나온 건데요. 지난해 4월 재선에 성공할 때 그의 공약이 정년을 65세로 높인다는 거였죠(이후 실제 법안은 64세로 조정함).

그런데 마크롱이 재선에 성공은 했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극우 후보를 피하려고 뽑은 거지 마크롱이 좋아서 뽑은 건 아니거든요. 최선이 아닌 차악을 선택했다고나 할까요. 마크롱은 ‘금수저’ 출신의 ‘부자들만의 대통령’이란 이미지가 강해서 원래 서민층엔 인기가 없습니다.

가뜩이나 비호감 이미지인 마크롱이 인기 없을 수밖에 없는 정년연장 법안을 밀어붙이고 있는 건데요. 어차피 이번이 마지막 임기인(세번째 대통령 출마는 불가능) 마크롱으로서는 모든 걸 건 셈입니다. 역사에 ‘연금을 개혁안 대통령’으로 기록되든지, 아니면 1년 만에 레임덕에 빠지든지 둘 중 하나가 되겠죠. 니스 대학 정치학 교수 빈센트 마르티그니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더 이상 협상의 여지가 없습니다. 둘(마크롱과 노조) 중 하나는 질 것입니다.”


7일 파리의 시위 참가자가 ‘마크롱 극혐’이라고 적힌 쿠션을 들고 있다. 파리=AP 뉴시스




도대체 프랑스의 연금개혁이 얼마나 시급하길래 대통령이 저렇게 강수를 두느냐고요? 그게 좀 애매합니다. 전문가들도 이념 성향에 따라 말이 다 달라요.

만약 ‘연금 적자가 지금 이미 너무 심해서 조만간 연금 기금이 고갈될 지경이냐’라고 묻는다면 그런 건 아닙니다. 2022년까지는 들어오는 돈이 나가는 돈보다는 많은 ‘흑자’ 상태이거든요. 하지만 2023년부터는 적자로 전환될 겁니다. 일하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은퇴한 사람은 늘어나니까요. 프랑스 정부는 적자폭이 해마다 GDP의 0.4~0.8%(약 18조~30조원)일 걸로 추산했죠.

마크롱 대통령은 “연금 제도를 손보지 않으면 머지 않아 적자의 늪에 빠진다”고 강조합니다. 올해 신년사에서도 “2023년은 연금개혁의 해가 될 것이다. 앞으로 수십년간 우리 (연금) 시스템의 균형을 맞추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공언했죠.

그런데 노조 얘기는 좀 달라요. 금재정이 아직 위기도 아닌데 정부가 위험을 부풀리고 있다고 반발하는데요. ‘서민이 피해보는 정년 연장 대신 부자한테 세금을 더 거두거나 부자들의 연금을 줄이라’고 요구합니다.





‘은퇴=축복’인 프랑스인

프랑스 연금제도는 유럽에서도 아주 후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때문에 프랑스는 평균 은퇴연령도 다른 유럽국가보다 낮은 60세 수준이다. 게티이미지




유럽에서 가장 너그러운 연금제도. 프랑스 연금 시스템을 설명할 때 흔히 하는 말인데요. 그만큼 은퇴자 입장에서 프랑스 연금제도는 환상적입니다. 모든 사람이 일할 때의 실질소득(세금과 연금보험료를 뗀 소득)의 74%를 연금으로 받으니까요. 인생의 4분의 1 이상(남성 평균 22년, 여성 26년)을 그렇게 지내는 겁니다. 평균적인 연금 수급자라면 일하는 근로자 평균보다 더 부유합니다. 퇴직자 중 빈곤선 이하의 비율이 4.4%로 38개 OECD국가 중 가장 낮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들 은퇴하기만을 기다립니다. 프랑스 사회학자 세르지 게랭은 “프랑스인은 은퇴를 인생의 오후, 축복받은 시간으로 간주한다”고 말합니다. 파리정치대학의 수석 연구원인 뤽 루반은 “많은 사람들에게 은퇴는 낙원에 도달하는 것과 같다”고 표현하죠.

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은퇴 뒤에나 찾아온다고 여기는 겁니다. 달리 말하자면 일을 하는 젊은 시기는 인생을 즐길 수 있게 되기를 기다려야 하는 인내의 시간인 거죠. 다들 빨리 은퇴하고 연금을 받고 싶어 안달인데요. 이 때문에 프랑스 노동법은 힘든 일(야간근무, 극한의 온도)를 하는 사람은 좀 일찍 퇴직할 수 있는 제도도 두고 있습니다.

은퇴가 곧 축복이라니, 왜 그리 정년 연장 저지에 목숨 거는지는 알 법도 한데요. 동시에 연금제도의 역사가 워낙 깊다는 점도 연금개혁에 대한 거부감을 키우는 요인입니다.

프랑스에 마치 ‘공동보험’ 같은 연금제도가 탄생한 건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5년입니다. 제도의 핵심 원칙은 ‘연대’입니다. 직업과 소득에 관계 없이 누구나 품위 있게 은퇴할 수 있도록, 모든 노동자와 고용주가 노인 세대를 위한 연금을 지불하게 한 겁니다. 세대와 집단을 뛰어넘어 상호의존의 관계가 되는 거죠. 이는 전쟁 직후 분열된 사회를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연금제도가 프랑스의 정체성으로 자리잡은 이유이죠.

프랑스 사회보호연구소의 크레티앙 소장은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의 국제적 위상이 미국에 비해 크게 떨어진 것도 연금제도에 대한 애착이 커진 이유라고 봤는데요. ‘우리(프랑스)는 미국처럼 강력하진 않지만 여전히 그들이 갖지 못한 것-세계 최고의 사회 보장 시스템-을 갖고 있다’는 게 국가적 자부심으로 자리잡았다는 해석입니다.





현재까진 정부와 노조 1승 1패

연금개혁은 정부가 설사 성공하더라도 자칫 ‘상처뿐인 승리’가 될 수 있다.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은 정년 연장을 골자로 하는 연금개혁안 통과 뒤 지지율이 추락하면서 결국 재선에 실패했다. 게티이미지  

은퇴가 축복이자 낙원이고, 연금제도는 국가 정체성이자 자부심이라니. 그럼 프랑스에서 정년 연장이 실현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하는 걸까요?

꼭 그런 건 아닙니다. 프랑스 정부는 과거에도 두차례 정년을 늘리는 연금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1995년과 2010년이었죠. 둘 다 엄청난 노조의 파업과 대규모 시위에 부닥쳤는데요. 1995년엔 3주 동안 이어진 공공부문의 장기 파업 끝에 결국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백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2010년엔 정년을 60세에서 62세로 늘리는 데 성공했죠. 1982년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시절 정년을 65세에서 60세로 낮춘 뒤 무려 38년 만의 변화였습니다(1982년엔 ‘고령자들이 빨리 은퇴해야 청년 실업 문제를 해결한다’는 논리로 정년을 단축했음).

당시 연금개혁안 통과는 니콜라스 사르코지 대통령의 큰 승리로 여겨졌는데요. 정부의 강한 의지와 연금개혁이 필요하긴 하다는 일부 여론의 지지, 그리고 노조와의 적당한 타협(일부 직업군은 정년 유지) 덕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당시 여당이 의회 과반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고요. 하지만 이후 지지율이 추락한 사르코지는 2012년 재선에 실패했습니다. 이 역시 연금개혁 탓이 꽤 컸죠.

이번엔 어떨까요? 일단 현재까지 여론은 썩 좋지 않습니다. 여론조사에 따라 적게는 3분의 2, 많게는 5분의 4가 정년연장에 반대하고 있죠. 특히 ‘50대 후반만 돼도 기업들이 채용을 안 해주는데, 정년을 64세로 늘리면 고령 실업자만 늘어날 판’이라는 비판적인 시각이 있습니다.

정부는 노동조합들과 수개월째 협의를 진행하곤 있지만, 여전히 성과가 없고요. 현재 여당(3개 정당 연합)은 의석을 다 합해도 250석으로 과반에 한참(39석) 못 미칩니다. 61석을 가진 중도우파 야당인 공화당을 끌어들이지 못하면 국회 통과가 불가능하죠.

무엇보다 국민들이 결국 어느 쪽 편을 들 것이냐가 중요합니다. 아직까진 노조 파업에 대한 찬성 여론이 조금 더 많은 편이긴 한데요. FT는 “시위가 더 파괴적이 되면서 시위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약화될지 여부에 많은 것이 달려 있다”고 설명합니다. 일단 노조 측은 ‘정유사 배송 중단’(주유소 기름이 동나게 됨)을 포함한 더 강한 파업으로 압박을 이어갈 거라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국민연금 개혁 이야기가 슬슬 나오고 있는데요.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가 되어버린 연금개혁. 과연 우리는 또 어떤 논쟁과 갈등을 겪게 될까요. 연금개혁을 둘러싼 프랑스의 난리통을 예의주시해보려 합니다. By.딥다이브

파업이 잦은 프랑스이지만 8개 노조가 연합해서 총파업을 하는 건 12년 만이라고 하죠. 그만큼 연금개혁이 프랑스에선 가장 뜨거운 이슈인 건데요. 경제, 정치, 복지, 고용 등 거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끼칠 광범위한 주제라서 딥다이브도 다뤄봤습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프랑스 정부가 정년을 62세에서 64년으로 연장하는 연금개혁을 추진 중입니다. 프랑스 노동조합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역대급 시위로 맞서고 있습니다. 프랑스 연금 재정은 올해부터 적자에 빠질 걸로 예상되는데요. ‘지금이 개혁에 나설 때’라며 밀어붙이는 정부와 ‘위기를 과장하고 있다’는 노조가 평행선을 달립니다. 프랑스에선 ‘은퇴가 곧 축복’입니다. 동시에 1945년 만들어진 공적연금제도가 국가의 정체성이자 자부심으로 여겨지죠. 연금개혁안에 대한 반발이 유독 큰 이유입니다. 과거 두차례 정년연장 시도에서 노조가 이긴 적이 1번, 정부가 승리한 게 1번입니다. 이번엔 어느쪽이 웃게 될까요. 아마도 이달 안에 국회 통과 여부는 결정될 겁니다.

*이 기사는 10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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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란 기자 har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