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사진]No. 9
▶ ‘보는 것은 믿는 것이다(Seeing is Believing)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도 같은 의미 일겁니다. 아무리 얘기하는 것보다 한 장의 사진으로 보여주는 것이 확실한 증명이고, 주장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진기자와 편집기자들이 많습니다. 신문사에서 사진기자들이 하는 역할이기도 하구요. 그런데 요즘 한국 정치에서는 사진이 정말 진실을 얘기하긴 하는 건지 헷갈리기도 합니다. 사진과 영상이 현장을 증명해도, 정치인들이 “맥락을 좀 더 봐야 한다”며 사진과 영상의 진실성을 부정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기자로서 이런 상황을 건너기 위해 무얼 더 준비해야 하는지 고민도 됩니다. 아무튼, 이번 주 ‘백년사진’의 옛날 신문에서는 사진보다 기사의 제목이 더 눈에 들어왔습니다. 열규(熱叫). 국어사전에는 나오지만 현대의 우리들은 거의 쓰지 않는 표현입니다. 절규보다 더 강한 표현으로 다가옵니다. 네이버 사전은 ‘있는 힘을 다하여 절절하고 애타게 부르짖음’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흰색 저고리를 입은 중년의 여인은 대중 앞에서 무엇을 애타게 부르짖고 있는 걸까요? 이번 주 ‘백년사진’에서 고른 사진은 1923년 3월 6일자 신문에 실린, 강연하는 여성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사진은 아무리 봐도 합성 사진입니다. 왜 신문에 합성 사진을 실었던 걸까요?
▶토산 부인의 열규 - 청중 2500명에 달한 성황을 다한 아낙네 강연
토산애용부인회 주최의 강연회는 예정과 같이 지난 4일 오후 7시 반경에 시내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열리었는데 원래 이 강연회에는 우리도 남과 같이 살기 위하여 우리 물건을 입고 쓰자는 강연회이라 이에 많은 열정을 가진 일반 민중은 정각 전부터 사면으로 모여들어 천도교당이 넘치고 터질 듯이 대성황을 이루었는데 그 수효가 무려 2500명에 달하엿으며 먼저 홍옥경 여사의 정중한 개회사가 있은 후 최영아 여사는 내 살림 내 것으로, 박영자 여사는 자작자급이라는 문제로 김건우 여사는 실지로 행하자는 문제로 김계송 여사는 토산애용에 대한 여자의 책임이라는 문제로 각각 조선사람으로 조선물건을 입고 쓰고 하여야 할 것을 가장 재미있고 열렬하게 말하여 일반 청중에게 많은 감상을 주고 10시 경에 무사히 폐회하였더라. 사진= 성황을 이룬 부인 강연회 (기사 참조)
▶토산애용부인회(土産愛用婦人會)는 말 그대로 국산품을 애용하자는 운동을 하는 여성단체입니다. 종로구에 있는 천도교 회관에서 일과가 끝난 오후 7시 30분 강연회가 열렸고, 우리 물건을 쓰자는 취지에 공감한 일반 시민 2500명이 모여 연단을 향해 눈과 귀를 모으고 있는 모습입니다. 앞줄 오른쪽 3열과 4열을 중심으로 무릎에 아이를 앉힌 여성들도 보입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성의 모습
▶이 사진을 자세히 보면 관중들의 시선이 불규칙합니다. 화면 왼쪽 1/2의 사람들은 왼쪽을 보고 있고 화면 오른쪽 1/2사람들은 오른쪽 정면을 보고 있습니다. 연설장의 일반적 특성을 고려한다면 연단이 두 개라는 의미가 되는데 주최측이 그런 식으로 배치를 했을 거 같지는 않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 사진은 두 장의 사진을 합성한 것 같습니다. 연사쪽에서 찍은 사진을 오른쪽에 붙이고 관중석 앞에서 찍은 사진을 왼쪽에 붙인 거죠.
사진의 오른쪽 부분
사진의 왼쪽 부분. 시선이 연사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지금이야 두 장의 사진을 각각 사용해서 설명을 따로 붙이는 방법으로 편집하면 되는데 그 당시에는 그 방식보다는 사진을 붙여서 현장을 표현하는 게 낫다고 본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왼쪽 한가운데 연사보다 더 큰 두 명의 얼굴이 이 사진이 합성일 가능성을 더 높여줍니다. 카메라는 두 사람 얼굴 가까운 곳에서 셔터가 한번 눌러졌고, 연사 옆에서 셔터가 한번 더 눌러진 것이라는 게 제 판단입니다.
물론 제가 모르는 사진 촬영의 기술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혹시 다른 가능성이 있으시면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2500명이라는 대규모 군중이 모여, 성황을 이룬 ‘국산품 애용 캠페인’ 현장을 표현하기엔 당시 사진촬영장비는 부족함이 많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국산품을 이용하자는 호소의 자리를 ‘열규’로 표현하고자 했던 당시 편집국의 분위기를 상상해 봅니다. 세상의 어떤 언어로 연사의 열변과 관중들의 뜨거운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까 찾던 중 ‘열규’라는 단어를 선택하지 않았을까요? 나라잃은 설움의 감정을 이 행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사진을 담당하던 기자들과 직원들 쪽에서는 ‘합성’ 또는 ‘콜라쥬’의 형식을 택해, 현장의 규모를 최대한 크게 보여주려 했던 것으로 이해합니다.
▶현장을 보여주기 위해 사진에 손을 대는 행위를 우리는 사진조작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역사 속에서 사진에 손을 대는 행위가 한쪽에서는 박수를 받기도 합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단 일장기를 말살한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폐간을 당하고 관련자들은 구속되는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일장기 말살 사건은 사진의 효용성과 기능을 통해서 일제에 저항하고 도전하는 한편 저항정신이 사라져가던 민중의 혼을 일깨웠다는데 큰 뜻이 있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이명동. 1977년 9월 신동아 “신낙균 저 ‘사진학 개설’의 복간” 기사에서)
▶정치권에서나 사회적 갈등이 심한 이슈에서 인파(人波)나 군중을 찍는 사진은 항상 논쟁거리가 됩니다. 주최측은 사람이 너무 적게 표현됐다고 하고 반대의견을 가진 측에서는 과장에서 표현했다고 주장합니다. 1980년대와 90년대 민주화 이후 대통령 선거 유세에 나선 후보들이 군중들을 등 뒤에 둔 채 사진기자들을 향해 포즈를 취한 이유도 자신을 지지하기 위해 모인 인파가 사진에 담기기 위해 스스로 연출을 한 것이라고 봐야합니다. 고도화된 연출 능력을 가진 정치인들과 사회 단체들이 만든 미쟝센 앞에서 기계적 중립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게 최소한 지금의 포토저널리즘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백년 전 서울에서 벌어진 ‘토산애용부인회’ 행사를 주최측은 최대한 규모를 많이 보여주고 싶었을 겁니다. 신문의 편집자들은 그 의도에 맞춰 사진을 붙여 만들어 게재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진으로 우리는 당시의 열기를 간접 경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100년 사진에서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시선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변영욱기자 cu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