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
지난달 말 통일부에 북한에서 보냈다는 서신이 왔다고 한다. 내용은 남북 이산가족 상봉 협의에 나올 테니 중국 다롄(大連)항을 통해 우선 쌀 2만 t을 보내달라는 것. 북한이 보낸 것이 맞다면 남북 관계가 급진전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통일부는 서신의 진위가 의심된다고 판단해 이를 무시했다고 한다. 전문성을 가진 통일부가 그렇게 판단했을 때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서신을 장난이라고 판단하기엔 북한의 식량 사정이 심각한 것도 사실이다. “북한에서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다”는 것은 대통령실과 통일부가 직접 지난달에 밝힌 내용이기도 하다.
물론 아사자 통계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1990년대 중반의 ‘고난의 행군’ 때에도 북한에선 굶어 죽은 사람들이 앓아 죽은 사람들로 보고가 됐다. 자기 관할 지역에서 아사자가 발생하면 책임 추궁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에 하급 간부들부터 아사자 발생을 인정하지 않는다.
북한 내부 소식통들을 통해 전해지는 소식들은 암담하기만 하다. 시장에 식량이 없어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들다는 것. 시장에 쌀이 없다면 아사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북한이 김정은의 참석하에 지난달 26일부터 나흘이나 식량 생산을 주제로 노동당 중앙위 전원회의 확대회의를 연 것도 내부 식량 사정이 심상치 않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왜 다시 아사 위기로 몰렸을까.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까닭이다. 코로나로 국경을 3년 넘게 봉쇄하다 보니 식량이나 비료가 제대로 들어가지 못한 것도 한 원인이다. 또 지난해 봄에 곡창지대가 심각한 가뭄 피해를 본 데다 장마철에 집중호우로 많은 논밭이 유실됐다.
김정은은 2021년 9월 ‘옥수수에서 밀과 보리 농사 중심으로의 방향 전환’을 새로운 농업 정책으로 제시했다. 이후 지난해 전국 곳곳에서 벼나 옥수수를 심던 논밭에 밀을 심기 시작했다. 어떤 곳에선 개인들의 텃밭에도 밀을 심으라고 강제했다는 말도 있다. 그래서 작년 전체적으로 밀과 보리 재배지가 30% 정도 늘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난해 밀 농사를 시작했던 거의 모든 농장이 계획을 수행하지 못했다고 한다. 밀을 심지 않았으면 벼나 옥수수를 심어 수확을 했을 텐데, 대신 심은 밀 농사가 망한 만큼 북한 전체의 식량 생산이 줄어든 결과로 나타난다.
밀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은 비료가 없고, 기상 조건도 좋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원인은 북한 농토가 너무 산성화돼서 밀 재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밀은 산성화된 토지에 취약하다.
식량난이 현실로 다가오자 북한은 6월까지 중국을 통해 60만 t의 식량을 수입한다는 계획을 세웠고 지금까지 약 10만 t이 선박과 열차로 북한에 들어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4월까지는 식량 위기가 존재하지만 60만 t이 다 들어가면 아사자 발생은 제한적일 수도 있다. 그런데 올해는 그렇다 쳐도 내년이라고 농사가 잘된다는 보장은 없다.
김정은이 지시하면 온 나라가 무조건 따라야 한다. 지난해 흉작에도 불구하고 올해 북한의 밀 재배지는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농민들이 밀 농사가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해도 불만을 말하면 반동으로 몰린다. 실제로 북한은 밀 농사 확대에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는 자는 반당·반혁명 분자로 처벌하겠다는 공문도 하달했다고 한다.
김정은이 집권한 지 벌써 12년이 지났다. 그런데 김정은이 농가를 방문한 것을 본 적이 없다. 심지어 농촌을 시찰한 것도 몇 년 전인지 가물가물하다. 이런 김정은이 농업의 총사령관이 돼서 “이거 심으라, 저거 심으라”라고 지시하고, 농민들은 불만도 말하지 못한다면 그런 북한 농업엔 미래가 있을 수가 없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