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강산의 스퀴즈번트] 만천하에 드러난 민낯, 일본은 더이상 라이벌이 아니다

입력 | 2023-03-13 16:00:00


한국 선수들이 체코전에서 7-3으로 승리한 뒤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제5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은 한국 야구의 민낯이 만천하에 드러난 대회다. 첫 경기였던 9일 호주전 패배(7-8)에 이은 10일 일본전의 4-13 참패까지. 말 그대로 참담한 결과다. 더 이상 어떤 설명도 필요없다. 이제는 실력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그동안 야구 한일전을 언급할 때 마치 ‘자동완성’ 처럼 따라붙은 말은 ‘숙명의 라이벌’이다. 일본을 상대로는 가위바위보도 져선 안 된다는 속설과 2000년대 초반 메이저 국제대회에서 좋은 결과를 냈던 기억들을 모두 소환하며 승리를 자신했다. 그럴 만도 하다. WBC만 봐도 2006년 제1회 대회(4강 진출)와 2009년 제2회 대회(준우승)에서 일본과 총 8차례 맞붙어 4승4패를 기록했고, 2008베이징동계올림픽에선 일본을 넘어 금메달까지 차지했다. 많은 국민들이 지켜보는 큰 대회에서 일본을 상대로 인상적인 장면들을 만들어냈으니, 자연스럽게 일본을 이길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겼다.

자, 여기서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다. KBO리그와 일본프로야구(NPB)의 실력차이다. 물론 일본이 영원히 못 넘을 산은 아니지만, 기본적인 실력차는 엄청나다. 이번 대회에서 일본의 1라운드를 책임졌던 선발투수들인 오타니 쇼헤이(LA 에인절스)-다르빗슈 유(샌디에이고 파드리스)-사사키 로키(지바 롯데 마린스)-야마모토 요시노부(오릭스 버펄로스)만 봐도 그렇다. 다르빗슈야 30대 후반의 베테랑이지만, 나머지 3명의 선발투수들은 여전히 20대다. 게다가 시속 150㎞대 후반의 강속구를 무리 없이 던지는 특급 투수들이다. 일본야구의 미래까지 짊어진 이들이다.

한국도 이번 대표팀에 미래의 주축이 될 자원들을 대거 포함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일본을 상대로 스트라이크조차 던지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번 대회를 지켜보며 가장 큰 우려를 남긴 포인트다. KBO리그에선 미래를 짊어질 영건으로 평가받지만, 일본과 맞붙어선 세계의 높은 벽만 실감한 것이다. 한 야구인은 이 장면을 지켜보며 “참담하다”고 했다.

일본 타자들의 변화도 무시할 수 없다. 과거의 일본 타자들은 거포 한두 명을 중심타선에 배치하고, 나머지 타자들이 상대 투수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점수를 짜내는 방식의 야구를 했다. 무사가 아닌, 1사에서도 득점권에 주자를 보내기 위해 희생번트를 시도하고, 접전 상황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점수를 뽑아내는 실리를 추구했다. 과거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의 대표 내야수였던 이시이 타쿠로가 히로시마 도요 카프 타격코치 시절 “무사 만루 또는 1·3루에서 병살타가 되더라도 3루 주자를 불러들인다면, 나쁘지 않은 결과”라고 밝힌 것도 일본 야구의 디테일을 설명한 것이다. 투수력이 워낙 강한 까닭에 1점만 뽑고도 지킬 수 있는 야구를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든 홈런을 쳐낼 수 있는 파워를 지녔다. 이번 대회에서 일본의 중심타선을 지키는 오타니와 무라카미 무네타카(야쿠르트 스왈로즈), 요시다 마사타카(보스턴 레드삭스), 오카모토 가즈마(요미우리 자이언츠), 마키 슈고(DeNA)는 언제든 30홈런을 쳐낼 수 있는 타자들이다. 야마다 데츠토(야쿠르트)와 야마카와 호타카(세이부 라이온즈) 등 벤치에도 거포들이 버티고 있다. 리그에서도 장타력을 지닌 타자들을 대타로 대기시키는 경우가 늘었다. 흐름에 맞게 변화한 것이다. 과거에는 일본의 강한 투수력과 한국의 장타력이 맞붙었지만, 이제는 투수들의 격차가 벌어지고 일본 타자들도 장타력을 갖추면서 둘의 갭이 엄청나게 커진 것이다.

과거에는 일본야구를 인정하지 못했다. 국민 정서까지 고려해야 했던 까닭에 무엇이 됐든 일본이 한국보다 강하다는 평가를 쉽게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차이를 인정하고, 배울 점은 배워야 한다. 그동안 경쟁자로 여겼던 일본이 세계 최고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한국야구는 제자리걸음을 넘어 오히려 퇴보했다. 이번 WBC의 결과가 이를 설명한다. 이제 일본은 더 이상 한국의 라이벌이 아니다. 장기적인 플랜을 수립하지 않으면 경쟁 자체가 되지 않는 현실이다. 일본전 콜드게임 패배를 면한 것을 다행으로 치부하는 상황은 말 그대로 수모다.

강산 스포츠동아 기자 posterbo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