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VB 파산 후폭풍] 美 실리콘밸리은행 파산 전말
10일(현지 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 실리콘밸리은행(SVB) 본사 앞에서 시민들이 공지문을 읽고 있다. 미 재무부와 연방준비제도(Fed),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는 폐쇄된 SVB 예금 전액을 보전해준다고 발표했다. 샌타클래라=AP 뉴시스
미국 보험 스타트업 ‘커버리지캣’의 공동 창업자인 맥스 조 씨는 9일(현지 시간) 몬태나주 보즈먼 공항에 도착한 후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인근 빅스카이에서 열리는 창업자 행사에 가던 동료 창업자들이 스마트폰의 ‘비행기 모드’를 해제하고 미친 듯 스마트폰 자판을 두들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파산한 실리콘밸리은행(SVB)에서 자신들의 돈을 빼내려 하고 있었다. 실리콘밸리에서 많이 쓰는 메신저 ‘슬랙’을 통해 SVB의 위기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조 씨도 뒤늦게 SVB 앱에 로그인해 돈을 다른 은행으로 옮기려 했지만 이미 자금이 묶여 인출할 수 없었다.
조 씨의 사례를 전한 월스트리트저널(WSJ)은 SVB가 8일 위기설이 불거지자마자 10일 곧바로 파산한 데에는 모바일 뱅킹을 통해 각종 금융 거래를 손쉽게 할 수 있고, 위기설 또한 빛의 속도로 퍼지는 시대적 배경이 영향을 미쳤다고 12일 분석했다. 1983년 설립된 SVB의 모기업 ‘SVB파이낸셜그룹’이 실리콘밸리의 주요 금융사로 성장하는 데 40년이 걸렸지만 무너지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36시간에 불과했다는 의미다.
● ‘스마트폰 뱅크런’
WSJ는 이날 ‘실리콘밸리가 만든 체계에 실리콘밸리가 당했다’는 기사에서 과거 금융 위기 때는 소셜미디어가 큰 변수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번개 같은 속도로 각종 소식을 전 세계에 퍼뜨려 ‘대규모 예금 인출(뱅크런)’을 야기했다고 진단했다. 일종의 ‘스마트폰 뱅크런’이 발발했다는 뜻이다.SVB의 위기가 처음 알려진 날은 8일. 당시 SVB는 약 18억 달러의 손실을 봤으며 자금 조달을 위해 신주 발행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이 소식은 슬랙, 와츠앱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곧바로 퍼졌다.
SVB 주가는 9일 나스닥 시장에서 개장과 동시에 급락했고 전일 대비 60.4% 하락 마감했다. 이날 하루 만에 SVB에서 빠져나간 돈은 약 420억 달러(약 56조 원). 하루 뒤인 10일 미 금융당국은 지급 불능 등을 이유로 SVB를 폐쇄하고 미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를 파산 관리자로 선임했다. 40년 역사의 은행이 파산하는 데 채 이틀이 걸리지 않았다.
WSJ는 각종 메신저와 소셜미디어에서 “나도 SVB에서 돈을 인출했다” 같은 메시지들이 떠들썩하게 오가면서 공포가 커지고 인출 속도 또한 점점 빨라졌다고 진단했다. 겁에 질린 고객이 스마트폰 화면을 누르고 미는 간단한 방법으로 자금을 빼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온·오프로 얽힌 실리콘밸리 생태계
스타트업, 벤처캐피털,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창업기획회사) 등 실리콘밸리의 각종 이해관계자들이 평소에도 온·오프라인에서 잘 연결돼 있다는 점 역시 스마트폰 뱅크런을 촉진시켰다는 분석이 나온다. 금융규제 전문가인 힐러리 앨런 아메리칸대 법학 교수는 블룸버그에 “벤처캐피털들은 SVB의 재무 상태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자마자 스타트업들이 자금을 회수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이들의 커뮤니티에서 빠르게 퍼진 소식이 현금 인출을 부추겼다”고 설명했다. 스마트폰 뱅크런에 대한 미 금융업계 전반의 대비가 소홀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블룸버그는 “지금처럼 ‘디지털 바이럴(입소문)’을 통해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뱅크런에 대응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