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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태평양전쟁 패배 직전 한반도서 자살공격기 500대 편성”

입력 | 2023-03-15 03:00:00

동북아역사재단 조건 위원 논문
미군 상륙함정 진공 막으려 계획
부산-제주 등 9곳에 비행장 신설
자살공격기 은닉 엄체 30개 확인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에 있는 항공군사유적 알뜨르 비행장에서 확인된 엄체. 조건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제공

“특공 공격으로 적의 상륙 선단을 격멸한다.”(일본군의 ‘결호·決號 항공작전에 관한 육해군중앙협정’ 중)

일본이 태평양전쟁(1941∼1945년) 패배 직전 한반도에서 ‘특공기 500대’를 이용한 가미카제(神風) 자살 공격으로 미군의 상륙 함정에 타격을 줘 진공을 막으려 했다는 논문이 나왔다. 결호 작전은 전쟁 말기 일본군이 일본 열도와 한반도의 방어를 위해 수립했던 전략이다.

조건 동북아역사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학회지 ‘한국근현대사연구’ 3월호에 게재 예정인 논문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일본군의 한반도 내 항공기지 건설과 의미’에서 당시 한반도 내 일본의 육·해군 항공기지 47곳의 건설 배경과 실태 등을 고찰했다. 논문은 전쟁 말기 한반도 내 일본군 항공 참모를 지낸 우에히로 지카다카(植弘親孝)의 회고록을 비롯해 일본이 패전 뒤 작성한 방위성 소장 ‘연합군 사령부 질문에 대한 회답’ 문서철 등 그간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료들을 분석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의 한반도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살 공격용 ‘특공기’ 500대의 운용 계획을 세우는 한편으로 특공기 은닉용 엄체를 조선 각지에 건설했다. 전국 각지에서 발견된 엄체 현황을 표시한 지도. 조건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제공

논문에 따르면 한반도에 주둔했던 일본 육·해군은 1945년 ‘최후 결전’을 위해 작전과 지휘 체계를 조율하면서 ‘결호항공작전에 관한 육해군중앙협정’ 문건을 작성했다.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가 소장한 이 문서철에서 발견된 별지 ‘일본 육군의 항공병력 배치 및 운용계획’에 따르면 제5항공군에 속한 항공기 700대 가운데 약 500대가 특공기(자살 공격기)로 편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조 연구위원은 “1943년까지만 해도 한반도 내 일본군 비행장의 주목적은 교육과 훈련이었으나, 전쟁의 판도가 열세로 뒤집히자 일제는 한반도를 수백 대의 자살 공격기가 발진하는 ‘죽음의 전장’으로 만들고자 준비했다”고 말했다.

일제는 미군과의 결전을 앞두고 조선에 비행장도 신설했다. 미군의 상륙이 가시화된 1944년 10월부터 1945년 4월 사이 부산 해운대, 전북 무안, 제주 등 총 9개 지역에 비행장을 신설했고, 대전과 울산 등지의 기존 비행장도 증설했다. 1945년 5월에는 전주와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 등에 눈에 잘 띄지 않는 은닉 비행장을 짓기도 했다. 이 같은 내용은 종전 직후 일본 복원청이 생산한 문서인 ‘비행장기록’과 우에히로의 회고록에 나온다. 일제는 항공기지 시설 건설 및 증설을 위해 수많은 조선인 청년을 부대원으로 충원했다. 전쟁 말기에는 야전비행장설정대가 편성되기도 했다.

일제가 가미카제용 특공기를 은닉할 엄체(掩體)를 조선에 총 200개 마련하려던 계획도 ‘결호병참준비요강’을 통해 확인됐다. 엄체는 적의 사격이나 폭격으로부터 병력과 장비를 보호할 수 있도록 콘크리트나 벽돌 등으로 벽과 지붕을 두껍고 견고하게 만든 설비다.

또 일본 방위성에 소장된 문건 ‘육군비행장 요람’에는 당시 일본군이 비행장 한 곳당 엄체를 많게는 46개나 건설하려 했던 것으로 나온다. 이 문건에는 육군 항공기지의 위치, 비행장 도면, 엄체 개수 등이 수록돼 있다. 엄체는 건설 도중 중단된 것도 적지 않지만 제주, 전남 무안, 경남 밀양 등 전국 곳곳에서 현재까지 확인된 것만도 30여 개에 이른다.

조 연구위원은 “전국에 산재한 엄체 유적을 통해 일제의 계획이 상당 부분 실행에 옮겨졌음을 알 수 있다”며 “한반도와 조선인은 ‘본토결전’의 인질로 사로잡힌 채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피해를 감내해야만 했다”고 설명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