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문학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이탈리아 볼로냐 라가치상에 한국의 신진 작가들이 선보인 그림책 4권이 선정됐다. 볼로냐 라가치상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BIB상’과 함께 세계 3대 그림책 상으로 꼽힌다. 올해 볼로냐 라가치상이 주목한 한국의 그림책들 중에서 ‘이사 가’(엔씨소프트)를 펴낸 이지연 작가(46)와 ‘벤치, 슬픔에 관하여’(스튜디오 움)를 만든 미아 작가(본명 이서연·32)를 최근 인터뷰했다. 신진 작가인 이들은 “그리고 싶은 이야기가 여전히 많다”고 입을 모았다.
●미아 작가, “색다른 형태의 그림책 만들 것”
“어린 시절 읽은 그림책들은 전부 왼쪽으로 책장을 넘기는 형태였어요. 천편일률적인 책의 형태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2023 볼로냐 라가치상’에서 오페라 프리마 부문 우수상을 받은 ‘벤치, 슬픔에 관하여’(스튜디오 움)는 책의 형태에 대한 의문에서 비롯됐다. 지난해 9월 이 책을 펴낸 미아 작가는 14일 인터뷰에서 “무엇을 그릴지보다 어떻게 넘길지를 먼저 생각했다. 그러자 소재와 주제는 뒤따라왔다”고 말했다.
서울 마포구에 있는 출판사 ‘스튜디오 움’에서 14일 만난 미아(본명 이서연) 작가가 자신이 펴낸 ‘벤치, 슬픔에 관하여’를 소개하고 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신진 작가인 그가 2020년 초 ‘벤치…’의 초안을 구상하며 가장 먼저 정한 건 형태였다. 그는 “양쪽에서 열리는 양문 형태를 결정한 게 첫 번째”라고 했다. 가로로 긴 책 구조를 결정하자 이와 동시에 기다란 벤치가 생각났다. 그는 “벤치 끝에 앉은 사람들이 양쪽으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마주쳤다 헤어지는 식”이라며 “책을 양쪽으로 넘기는 구조 자체로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을 보여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벤치 위에 어떤 얼굴들을 그려 넣느냐’였다. 모르는 얼굴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익숙한 얼굴들로 가득한 가족 앨범을 펼쳤다. 그는 “사진첩을 보다가 어린 시절 내 곁에 있어준 가족들이 지금 내 곁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이런 만남과 헤어짐에는 이유가 없었다. 어쩌면 이것이 슬픔의 진정한 원인이 아닐까”라고 했다. 텅 빈 벤치에 실체가 있는 익숙한 가족의 얼굴을 그려 넣자 ‘슬픔’이란 감정이 떠오른 것. 그렇게 부제와 색깔이 정해졌다. 표지와 페이지를 채운 색 ‘블루(blue)’는 ‘우울한’이란 뜻도 갖고 있다.
양쪽으로 그려진 페이지를 넘기면 벤치에 앉은 사람들이 마주쳤다 헤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미아 작가 제공
●이지연 작가, “어린 시절 내가 놓친 세상 그릴 것”
가로로 기다란 그림책에 바닥을 기어가는 개미 떼의 움직임이 파노라마처럼 담겨 있다. 아이의 손길이 닿고 발을 내딛는 곳 아래, 개미들이 꿈틀대며 부단히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2023 볼로냐 라가치상’에서 픽션 부문 우수상을 받은 ‘이사 가’(엔씨소프트)의 주인공은 놀이터에서 뛰노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그들 발아래에 놓인 개미 떼다. 지난해 10월 이 책을 펴낸 이지연 작가는 13일 전화 인터뷰에서 “모래놀이터에서 놀던 어린 시절의 내가 놓쳤던 개미들의 세상을 담았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의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세계를 그리고 싶었어요. 어른이 된 나는 이제 그 세계를 이해하고 볼 수 있게 됐잖아요. 아이들에게 제가 먼저 알게 된 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이지연 작가는 13일 전화 인터뷰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내가 뒤늦게 그림책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뒤 수 년 동안 책만 읽으며 ‘어떤 작가가 될지’ 고민했다. 소외된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를 비추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지연 작가 제공
그는 습관처럼 자신의 걸음걸이가 찍힌 발자국을 뒤돌아보다가 이 책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이 작가는 “어릴 적 따뜻한 햇볕 아래 놀이터 바닥에 앉아 모래를 휘저으며 놀았던 기억은 누구나 간직하고 있다”며 “우리는 그 순간을 분명 행복하게 기억할 테지만 과연 우리의 발아래 있던 개미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돌아보게 됐다”고 했다.
이지연 작가가 지난해 10월 펴낸 ‘이사 가’(엔씨소프트)의 한 페이지. 아이가 발을 내딛는 곳에 살던 개미들이 화들짝 놀라며 피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엔씨소프트 제공
책에 그려진 수백 마리의 개미는 모두 다른 생김새다. 그는 “똑같은 개미를 ‘복붙(복사 붙여넣기)’해서 그릴 수도 있었지만 사람처럼 개미들도 서로 다 같지 않고 다를 것이기 때문에 일일이 다른 형태로 손수 그렸다”고 했다.
2015년 펴낸 전작 ‘우리 집에 갈래?’(엔씨소프트)에선 어둑한 골목에 버려진 곰 인형에게로, 두 번째 책에선 놀이터 바닥의 개미에게로 향한 그의 시선은 이제 어디로 향할까. 이 작가는 “차기작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아주 작은 식물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라며 “앞으로도 내가 놓쳐온 세상은 없는지 뒤돌아보며 그림을 그려나가겠다”고 말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