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 없는 사회’ 도래로 결제에 어려움 미국 유럽처럼 ‘현금 결제권’ 보장해야
김유영 산업2부장
최근 종합병원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한 할머니가 버스 입구에서 기사와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버스카드 없으세요?”라고 연거푸 묻는 기사에게 할머니는 “현금밖에 없는데…”라며 말끝을 흐리기만 했다. 결국 기사가 종이 안내문을 주며 ‘여기 적힌 계좌번호에 송금하고 타라’고 하자 할머니는 “아이고, 이걸 어떻게…”라며 바로 내려버렸다. 할머니 얼굴엔 난감함과 난처함을 넘어선, 어떤 복잡한 표정이 어려 있었다. 버스카드도 안 쓰는 사람에게 모바일 송금을 요구하는 건 무리로 보였다.
이달 1일부터 서울에서 현금을 안 받는 버스가 기존 400여 대에서 1800여 대로 본격 늘면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현금 결제가 어렵다면 계좌 송금을 안내하고,그래도 현금 결제를 고수하면 미납 승객처럼 하차 요구도 할 수 있게끔 했다. 현금 수입은 연간 100억 원 남짓한데 현금 거래 유지관리비가 20억 원 든다는 등의 버스업계 고충을 감안한 조치다.
실제로 우리 사회가 현금 없는 사회(cashless society)를 표방하며 현금 결제 비중이 급속도로 낮아졌다. 코로나19를 거치며 비대면 경제가 확산되면서 이젠 현금을 안 갖고 다녀도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세상이 됐다.
미국에서 로컬 농장 채소로 샐러드를 만들어 ‘샐러드계의 블루보틀’로 통하는 스위트그린(Sweet Green)은 한때 전국 100여 개 매장에서 현금을 안 받겠다고 선언한 적이 있었다. 수납 시간이 길어지고 위생상 좋지 않다는 이유였다. 유니콘(기업 가치 10억 달러 이상)인 이곳은 결제 혁신까지 이루겠다는 포부도 있었다. 하지만 곧 소비자 반발에 부딪혔고 2년여 만에 철회했다. ‘현금 거부는 고객 접근성을 낮춰 누구나 진짜 음식(real food)을 먹을 수 있다는 회사 가치(value)와 안 맞는다’는 이유를 들었다.
미국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등은 고령층이나 청소년, 이민자 등 ‘지급 약자’를 배제하지 않으려 ‘현금 결제권’을 보장하는 추세다. 미국 뉴욕시는 현금 거부 매장에 처음엔 벌금 1000달러를, 이후엔 1500달러를 물린다. 9가구 중 1가구가 신용카드나 은행 계좌가 없다는 점을 감안했다. 샌프란시스코, 필라델피아, 뉴저지, 매사추세츠 등이 현금 거부를 금하고 있다.
한국은 스타벅스를 필두로 커피전문점, 멀티플렉스 극장, 프랜차이즈 식당 등에 현금 없는 매장이 확산되고 있다. 여기에 공공 인프라인 버스에서 현금을 안 받는다면 이런 추세가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버스 현금 결제 비중이 1%도 안 된다지만 1% 안 되는 이들도 다양한 권리를 누려야 하는 시민이다. 한국은행법 제48조는 ‘한국은행이 발행한 한국은행권은 법화로서 모든 거래에 무제한 통용된다’라고 써 있다.
어떤 사회학자는 현금 거부는 인간 존엄성을 해친다고까지 했다. 버스에서 내릴 수밖에 없던 할머니에게서 딱 그 말을 떠올렸다. 현금 없는 거래가 혁신적이고 편리하지만 지급 약자를 배려해야 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기술이 발달해도 약자를 배제한다면 그 사회는 미성숙하다. 현금 결제를 권리로 보장하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참고해야 한다.
김유영 산업2부장 ab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