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꺾이지 않는 청년 진도진 씨와 걸그룹 ‘페리블루’
“사회변화로 인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에서 기성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말.”
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사실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 와있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 아닌가요.
걸그룹 페리블루. 왼쪽부터 도진 현지 선아 시호 혜영 슬. 유튜브에서 페리블루를 쳐보면 그들의 뮤직비디오들을 감상할 수 있다. 진도진 씨 제공
▶‘넘어지고 쓰러져도 꺾이지 않는 청년’ 진도진 씨(상)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230303/118158182/1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230311/118281679/1
“제가 원래 그리 외향적인 성격은 아니거든요. 오히려 내성적인 편이죠. 그런데 페리블루와 함께 하며 인생의 껍질 하나를 깨고 나왔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뭔가를 향해 노력하는 게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는 걸 배웠다고 할까요. 그건 어디서도 쉽사리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멤버 슬)
청계천을 가끔 걷는다. 뚜벅거리다보면 광장시장 언저리에서 드문드문 마주치는 어르신이 한 분 있다. 지금껏 말을 건네 본 적은 없다. 다만 그때마다 혼자 지은 별명을 슬쩍 속으로 불러본다. ‘호루라기 봇짐 할배.’ 이유는 간명하다. 항상 괴나리봇짐 같은 걸 지고 입엔 호루라기를 문 채여서다.
지난달 말 서울 백암아트홀 연습실에서 걸그룹 ‘페리블루’를 만났을 때, 뜬금없이 그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왜였을까. 뭐 하나 닮은 구석이 없는데. 그저 별명까지 지어놓고 얼굴 한 번 제대로 쳐다본 적 없구나 싶었다. 왜 그리 호루라기를 불어대는지 알아볼 맘도 없이. 그냥 성가셔서, 얼른 지나치고 싶었을 뿐. 우린 다들 서로에게 그러고 사는구나.
지난달 말 서울 강남구 백암아트홀 연습실에서 만난 걸그룹 페리블루. 이들은 일주일에 2번 정도씩 오후 10시에 모여 다음날 오전 6시까지 보컬과 안무 연습을 한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물론이죠. 우리 미래가 장밋빛만 가득하지 않다는 건 저희가 더 잘 알아요. 소속사도 없이 활동하다보면 한계를 느낄 때도 적지 않고요. 나이가 적은 것도 아니고, 각자 생계도 꾸려야하고.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들은 월세 감당하는 것도 만만치 않죠. 근데 그게…, 꿈을 포기해야 하는 이유가 되나요?”(멤버 선아)
실제로 페리블루 멤버들은 삶을 꾸려가는 게 만만치 않다. 만화카페 알바, 일반 사무직 직장인, 보컬트레이너, 온라인 패션모델…. 그러다보니 함께 연습하러 모이는 건 일주일에 1, 2번 밖에 짬을 낼 수 없다. 그것도 퇴근한 뒤에야. 그렇게 보통 오후 10시쯤 모인 멤버들은 다음달 오전 5시에야 안무와 노래 연습을 마무리한다고 한다. 하룻밤 잠을 포기한 채 새벽버스가 다닐 때까지.
“당연히 피곤하고 힘들죠. 근데 그거 아세요? 끝내고 아침 찬바람을 맞을 때 오히려 머리가 더 또렷해져요. 그날 연습이 잘 됐으면 만족스러워서, 뭔가 좀 잘 안 됐을 땐 어떻게 부족한 걸 채워야할지. 그 상쾌함은, 제가 뭔가 한발 더 다가서고 있다는 기분 같은 거예요.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멤버 혜영)
걸그룹 페리블루는 백제예술대학 K-POP과에서 서로를 만났다. 1회성 프로젝트 그룹이었지만, 서로 목표가 같고 마음이 잘 통한다는 걸 느끼고 함께 걸그룹을 이어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저희가 페리블루를 ‘취미 활동’으로 여겼다면 그래도 되겠죠. 근데 그렇게 대충 즐기는 거라면 보시는 분들도 금방 알지 않을까요. 멤버들이 음악을 시작한 이유는 각자 다를 거예요. 그런데 함께 땀을 흘리는 이유는 하나예요. 진짜 제대로 끝까지 해보자. 그 앞에 성공이 기다릴지 실패가 기다릴지는 누구도 모르죠. 그런데 결국 원했던 걸 이루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아쉬움은 남기지 말아야 하니까요.”(멤버 선아)
“인생 전체로 봤을 땐 아직 충분한 시간이 있죠. 하지만 걸그룹으론 그리 많은 기회가 남아있는 건 아니에요. 언제까지 춤추고 노래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얘들이 해봐야 어디까지 하겠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거예요. 대중의 마음을 얻는 게 그리 쉬울 리도 없고요. 하지만 언젠가는 ‘페리블루는 진심을 다해서 노력하는 친구들이야’라는 얘길 듣고 싶어요.”(멤버 시호)
걸그룹 페리블루 멤버들은 이미 늦은 시간에 모여 피곤했을 텐데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연습은 진지하게 임하면서도 잠깐 쉴 때면 즐겁게 장난치는 유쾌한 청년들이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어둔 밤 여전히 불 켜진 연습실을 다시 올려다봤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페리블루를 관심 깊게 바라볼진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그들을 만나기 전 떠올렸던 생각에서 한 가지, ‘기대보다’는 빼기로 했다. 페리블루는 ‘음악이 좋다.’
그때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그러고 보니 청계천 봇짐 할배는 누군가 가까이 있으면 절대 호루라기를 불지 않았다. 사람들이 멀찍이 떨어졌을 때 홀로 단발마처럼 빽 하고 불었다. 남들에게 불편을 끼치려는 의도는 아니었던 듯.
어쩌면 어르신에게 호루라기는 힘든 봇짐을 이겨내는 자신을 위한 응원도구가 아니었을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남들이 뭐라건 가야할 길을 가기 위해. 그렇게 걸어가는 인생은 절대 누추하지 않을 테니.
페리블루는 그 소중한 호루라기를, 이미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걸그룹 페리블루. 가장 좋아하는 포즈를 보여달라고 부탁했더니, 서로를 껴안으며 등에 기대는 자세를 취했다. 함께 손잡고 껴안을 수 있는 친구가 있는 청년들은 인생의 승자지 패자가 아니다. (※이날 멤버 현지는 개인 사정상 참석하지 못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