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사진]No. 10 100년 전 청량리 들판을 걷는 소달구지
▶나른한 봄기운에 잎을 터뜨리기 시작한 버드나무 숲 앞에서 짙은 색의 황소 두 마리가 각자의 수레를 끌고 갑니다. 짐칸은 비어 보이는데 힘없는 모습입니다. 뒷모습이어서 더욱 무기력해보입니다. “버드나무 숲에 아지랑이”라는 간단한 제목과 어제 청량리에서 촬영했다는 정보만 있습니다. 딸려있는 기사도 없고 사진에 대한 설명도 더는 없습니다. 성큼 다가온 봄을 전하는 것 같지만 묘한 느낌의 사진입니다. 1923년 3월 15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입니다.
버들 숲에 아지랑이 - 어제 청량리에서
▶도시화가 완전히 진행된 지금이야 서울 청량리에서 버드나무 숲과 들판을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만 100년 전에는 완전 농촌이었었군요. 하기야 동대문 서대문 등 4대문 안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던 시절이라 청량리만 하더라도 도시와는 거리가 먼 풍경이 펼쳐졌었을 겁니다. 사진하는 사람들이라면 탁 트인 농촌 풍경을 좋아합니다. 지금도 사진작가들은 이런 풍경을 찾아가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의 세부 모습
▶이런 사진을 한국 사진기자들은 ‘스케치 사진’이라고 분류합니다. 물론 100년 전 사진하던 분들이 이런 사진을 스케치 사진이라고 불렀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지금의 사진기자들이 그렇게 부른다는 뜻입니다. “SKETCH.” 스케치북을 펼쳐서 눈앞의 풍경을 그리듯이 카메라로 풍경을 ‘툭’하고 포착한다는 의미입니다.
사진기술이라는 게 우리나라에서 개발된 것이 아닌, 외래 문물이고 사진의 표현법도 분명 처음에는 외국의 사진을 본 따는 방법으로 시작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스케치 사진은 상당히 한국적인 표현 방식으로 자리 잡아 왔습니다. 미국과 유럽의 포토저널리즘 교과서에는 스케치 사진이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인물사진, 사건사고사진, 천체 사진, 생태사진, 천체사진 등등 우리의 사진 분류에 해당하는 용어가 있지만 우리의 사진 분류인 ‘스케치 사진’은 영어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서양에서는 포토저널리스트들이 스케치 사진을 많이 찍지 않습니다. 외국 기자들은 도시 풍경이나 날씨 사진을 ‘Daily life’ 또는 ‘Feature‘ 사진 정도로 가볍게 촬영하는 것 같습니다. 대신 그들은 뉴스와 스포츠 사진 등에서 에너지를 집중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사진기자들은 스케치 사진을 많이 찍습니다. 저도 산과 들판, 바닷가 등을 돌며 스케치 사진을 참 많이 찍었고, 봄꽃이 피는 순서를 복수초, 동백, 매화, 산수유, 목련, 개나리, 진달래, 벚꽃, 철쭉 이렇게 외우고 다닌 적도 있습니다. 한국 사진기자들이 지금 촬영해 신문에 쓰는 스케치 사진을 외국 사진기자들은 거의 엄두도 못낼 겁니다. 소재를 발견하고 그림처럼 완벽한 구도에 피사체를 배치하고 시선까지 고려한 완벽한 사진을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 사진기자의 스케치 사진은 최첨단의 앵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케치 사진의 역사가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게다가 원조일 가능성이 높은 일본에서도 빈도가 낮은 사진이 왜 우리 사회에는 많았던 걸까요? 일제의 강압적 통치 상황에서 그나마 우리나라의 문화와 풍경이라도 보여주려 했던 신문 제작자들의 의도가 있었을 거라는 가정이 가능합니다. 간헐적으로 일어났던 압제에 대한 반항이나 항쟁을 사진으로 표현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책잡히지 않을 애매한 표현으로 글을 쓰듯이, 메시지가 애매한 풍경이나 날씨 사진으로 시대를 표현했을 가능성을 위의 두 석사 논문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도 공감합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군사독재정권 시절, 한국 신문에서 스케치 사진이 더욱 빈번하게 게재되고 앵글이 첨단으로 발전했던 것 역시 사진이 억압적 권력 앞에서 어떻게 버텨 가는지를 보여준다고 주장하면 과한 걸까요? 군사독재시절 현장 사진으로 승부를 가리기가 어려울 때 피 끓고 의욕 넘치는 포토그래퍼들이 에너지를 집중한 것이 날씨 스케치 사진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럼 정치 상황이 변했는데도 왜 아직 스케치 사진이 신문에 게재되는 걸까요? 저는 한국의 사진기자들에게 세상이 아니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신문사의 구성원들과 독자들이 원하는 역할에 아직 ‘풍경의 전달자’ 역할이 있기 때문인 거 같습니다. 관성이란 게 무서워서 아직 달려오던 속도를 한꺼번에 줄이지 못하고 있는 거죠. 게다가 아직은 신문 독자가 농촌과 자연 속에서 유년과 청년시절을 보낸 세대이기 때문에 일종의 향수 같은 것도 작동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신문에서도 스케치 사진은 최근 10년 사이에 많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신문에 실리던 ‘조롱박 풍경’이나 ‘논두렁 물꼬트기’ 사진이 이제는 거의 실리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청량리 들판에 100년 전 등장한 소달구지 사진을 보면서 눈에 띈 게 하나 있습니다. 농부인지 상인인지 모를 소달구지의 주인은 왜 달구지를 타고 가지 않고 걸어가는 걸까요?
사진의 왼쪽 세부
사진의 오른쪽 세부
소설 ‘대지’의 작가, 펄벅 여사가 1960년대 한국에 왔을 때 일화가 있습니다. 황혼녘 경주의 시골길을 지나고 있는데, 한 농부가 소달구지에는 가벼운 짚단이 조금 실려 있었지만 자기 지게에도 따로 짚단을 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힘들게 지게에 짐을 따로 지고 갈 게 아니라 달구지에 짐을 싣고 농부도 타고 가면 편했을 것이라고 생각한 펄벅은 농부에게 “왜 소달구지에 짐을 싣지 않고 힘들게 지고 갑니까?”라고 물었답니다. 농부는 “에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저도 일을 했지만, 소도 하루 종일 힘든 일을 했으니 짐을 서로 나누어져야지요”라고 답을 했습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다는 펄벅 여사는 감탄하며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저 장면 하나로 한국에서 보고 싶은 걸 다 보았습니다. 농부가 소의 짐을 거들어주는 모습만으로도 한국의 위대함을 충분히 느꼈습니다.”
▶여러분은 100년 사진에서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시선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봄입니다. 황소처럼 힘차게 살아보시죠. 같이.
변영욱 기자 cu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