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때로 미완성품이 완성품보다 더 심오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미켈란젤로의 ‘론다니니 피에타’가 그러하다. 완벽에 가까운 ‘바티칸 피에타’와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그가 스물네 살 때 교회의 의뢰를 받아 만든 ‘바티칸 피에타’는 정말이지 완벽하다. 죽은 아들을 안고 슬퍼하는 마리아의 모습에서는 편안함과 아름다움과 숭고함이 느껴진다. 그런데 일흔일곱 살에서 시작하여 여든아홉 살에 죽을 때까지 작업했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한 ‘론다니니 피에타’는 그렇지 않다. 편안함이나 우아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균형미도 없고 안정감도 없는 것 같다.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뒤에서 안고 있는 형상인데 묘하게도 마리아가 예수에게 의지하고 기대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죽은 아들이 슬퍼하는 어머니를 위로하는 역설. 그것이 조각가의 의도인지, 우연의 결과인지, 그저 착시인지는 모를 일이다.
교회의 요청으로 ‘바티칸 피에타’를 만들었을 때만 해도 미켈란젤로는 야심이 있는 스물네 살의 젊은이였다. 그는 조각가로서의 재능을 과시하고 싶었던지 아들의 죽음에 슬퍼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아름답고 우아하고 숭고하게 형상화했다.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처참한 모습과 마리아의 슬픈 모습이 시각적으로 아름다울 수는 없다. ‘바티칸 피에타’는 그의 예술적 재능과 야심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는 노년의 나이가 되면서 예술에 회의를 느꼈다. 예술가로서의 세속적 성공도 허망한 것 같았고 예술의 재현 능력에도 회의적이었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