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를 영화로 읊다]〈55〉살구꽃과 체리 향기
영화 ‘체리 향기’에서 바디는 차를 몰고 다니며 자살을 도와줄 사람을 찾아 헤맨다. 영화사 백두대간 제공
봄이 왔다. 남쪽에선 벌써 살구꽃이 피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예로부터 살구꽃은 봄, 고향, 술집 등을 상징하는 꽃으로 시인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조선 후기 학자 김상연(1689∼1774)이 읊은 살구꽃은 이와 달라 강렬한 인상을 준다.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체리 향기’(1998년)에서도 삶의 끈을 놓으려는 중년 남자 바디가 나온다. 바디는 자동차를 몰고 도시 외곽을 돌며 자살을 도와줄 사람을 찾아다닌다. 왜 죽으려 하는지 드러나진 않지만, 바디의 공허한 눈빛은 그의 삶 역시 순탄치 않았음을 암시한다. 바디의 제안을 군인도 신학생도 거절했지만 박물관에서 동물 박제를 하는 노인이 받아들인다. 그런데 노인은 도와주겠다면서도 바디에게 자신이 경험한 작지만 소중한 삶의 기쁨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신 역시 삶에 지쳐 생을 끝내기 위해 체리 나무 위로 올라갔지만 탐스럽게 익은 체리를 먹다 마음이 바뀌어 집에 돌아왔다며. 봄날 체리의 맛을 포기할 수 있냐고 묻는다. 영화는 바디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끝내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 마지막에 바디는 자신이 파놓은 구덩이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다본다. 영화는 다음 날 아침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여주지 않지만, 관객은 그가 삶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라 확신하게 된다. 시인도 그러지 않았을까? 죽음을 준비하던 시인이 마침내 깨달은 것 역시 대자연의 섭리와 삶의 아름다움이었을지 모른다. 절망과 고통 속에서 영화도 시도 한 줄기 빛을 발견한다. 그것은 체리의 달콤한 맛이거나 살구꽃의 고운 빛깔일 것이다.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