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석 서울대 혈액종양내과 교수
암 치료를 받는 환자들이 요청하는 직장 제출용 소견서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안정가료가 필요하여 직장을 쉬어야 한다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일하는 데 지장이 없으니 복귀해도 된다는 내용이다.
안정가료가 필요하다는 내용의 소견서를 받아가는 사람들은 대개 공무원, 교사, 대기업 사원, 전문직 등 선망의 대상인 정규직 종사자들이다. 반면 직장 생활에 문제가 없다는 소견서를 받아가는 분들은 주로 중소기업 근로자, 공장 노동자, 계약직 등 비정규직에 종사하사는 분이다. 이들은 간혹 ‘암’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회사에서 잘리니 ‘암’이라는 단어 없이 소견서를 써 달라는 억지를 부리기도 한다.
사실 치료의 부작용이 사라지고 질병 이전의 몸 상태로 온전히 돌아올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점은 없다. 관련 연구 결과를 참고하거나 의사의 경험을 바탕으로 쓸 뿐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비슷한 질병 상황에서 누구에게는 ‘안정가료를 요한다’라는 소견서를 쓰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업무에 지장이 없다’고 써야 하는 모순에 놓이기도 한다. 진료실에서 마주하는 사회적 불평등 앞에서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고, 양극화된 직업 체계에서 의학은 생각보다 무기력하다.
한번은 택배 배달을 하는 환자에게 매일 택배를 200개씩 나르는 일이 힘들지 않냐고 물었다. 그는 일이 힘들지만 돈 없는 것은 더 힘들다고 대답했다. 아파서 죽으나 굶어 죽으나 매한가지이니 차라리 돈 벌다가 죽는 편이 낫다는 이들을 보면, 결국 휴식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만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정말 쉬어야 하고 직장에 복귀하면 안 된다고 말리지만 기어이 직업 현장으로 복귀하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아파서 쉴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일종의 특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의 많은 기업에서는 무급 질병휴직은 허용하지만 수개월 이내에 복귀하지 않을 경우 해고 사유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보통 사람들도 취직이 안 되는 세상에서 암환자라는 사회적 낙인이 찍힌 사람들에게 재취업은 요원한 일이다. 아파도 일하는 게 속편하다는 말이 나올 만도 하다.
김범석 서울대 혈액종양내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