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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의 도발] 대통령의 5792자 발언이 설득에 실패한 이유

입력 | 2023-03-24 14:00:00


정치는 말(言)이다. 윤석열 대통령을 대통령감으로 전 국민에게 각인시킨 것도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 한마디였다. 국정원 댓글 수사와 관련해 2013년 10월 국감에서 나온 불후의 명언이다.

일제 강제동원 해법에 대해서도 이 정도 발언은 나올 줄 알았다. 윤 대통령이 진정 고뇌 끝에 내린 결단이었다면 말이다. 아니었다(기억에 남는 발언이라면 ‘미로에 갇힌 대통령’ 정도?) . 대통령은 21일 국무회의 자리에서 읽은 5792자 분량의 원고는 국무위원 교육용이라면 몰라도 국민 설득용으로는 형식과 내용 모두 실망스러웠다.


● 일본신문 인터뷰보단 친절했어야
나는 지난번 ‘도발’에서 정부의 제3자 변제 방식이 현재로선 최선이라고 썼던 사람이다. 그러면서 대통령이 피해자들에게, 그리고 국민에게도 좀 더 마음을 썼으면 좋겠다고 썼다.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16일 한일 확대정상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대통령실사진기자단

한일 정상회담 뒤에도 비판 여론이 꺼지지 않자 대통령이 직접 설명에 나선 건 좋다. 방일 전에 했더라면 좋았겠지만, 늦더라도 일단 나섰으면 국민 기대치보다 한발은 더 나갔어야 했다. 적어도 일본인을 대상으로 했던 일본 요미우리신문 인터뷰보다는 자국민에게 친절했어야 마땅했다는 얘기다.

정석은 기자회견을 통해 국민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것이다. 대통령은 하지 않았다. ‘날리면’ 파문 이후 도어 스태핑도 없애고 신년 기자회견도 달랑 모 조간신문 한 곳과 했던 윤 대통령이 한국인 기자들한테 껄끄러운 질문 던질 멍석을 깔아줄 리 없다(자국 기자를 피하는 건 자국민의 ‘알 권리’를 외면하는 것과 같다는 걸 모르는지 안타깝다).


● 국무회의 의장석에 앉아 대국민 담화?
질문은 받기 싫고, 할 말은 많은 윤 대통령이 할 수 있는 건 담화문밖에 없을 터. 국어사전에 따르면 ‘공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어떤 문제에 대한 견해나 태도를 밝히기 위해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글’이 바로 담화문이다. 21일 윤 대통령이 국무회의 모두발언 중간에 “국민 여러분, 이제는 일본을 당당하고 자신있게 대해야 합니다”라고 국민을 호명한 부분이 담화문임을 입증한다. 그럼에도 대통령실 관계자는 이것이 “(담화문 아닌) 대(對)국민 담화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양심에 찔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말이 난무하는 나라라 해도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할 적엔, 공적 인물이 국민(을 대신하는 카메라) 앞에 바른 자세로 서서 담화문을 읽는 게 원칙이다. 1965년 한일협정 당시 세 차례나 담화문을 발표했던 박정희 대통령도 그렇게 했다.

윤석열 대통령(왼쪽)과 1987년 4월 13일  호헌 조치 담화문을 발표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 대통령실사진기자단, 동아일보DB

사진 자료를 뒤져보니, 대통령이 앉은 자리에서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한 예는 제5공화국 독재자 전두환 정도다. 4·13 호헌 조치 같은 담화문을 국무회의 아닌 대통령 집무실에 홀로 앉아 거만하게 읽었다. 이번처럼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의장 자리에 앉아 모두발언 형식으로 ‘대국민 담화 수준’을 읽는 경우는 처음 봤다.


● 박정희만큼의 공감 능력도 없다니 
국민을 존중하는 태도가 안 보이는 ‘대국민 담화 수준’이란 형식은 사소한 문제라고 쳐주자. 국민을 설득하려는 대통령이라면 무엇보다 국민의 감정을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라도 해봤어야 한다. 그것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수십 번 읽었다는 ‘설득의 심리학’ 같은 책에 나오는 소리다. 그러나 윤 대통령의 원고에 국민의 정서를 배려하는 대목은 없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러지 않았다. 1964년 3월 24일 서울에서 5000여명의 대학생들이 한일수교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자 26일 내놓은 특별담화문에서 “민주주의 국가인 이 나라에서 더욱이나 국가장래를 위한 우국충정의 일념에 불타는 젊은 학생들이 한일문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시위에 나선 그 심정은 나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했다. 그다음에야 “그러나…”하고 설명을 하는 식이다.

1965년 한일 수교 관련 특별담화문을 발표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 동아일보DB

윤 대통령 연설에는 “출구가 없는 미로에 갇힌 기분” “저 역시 눈앞의 정치적 이익을 위한 편한 길을 선택해 역대 최악의 한일관계를 방치하는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는 등 대통령 자신의 기분과 입장만 나온다. 국민의 상처받은 자존심에 대해선 관심도 없는 것 같다. 피해자에 대해서도 “정부는 피해자와 유족의 아픔이 치유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한 줄 뿐이다.

그리고는 ‘이것도 몰라?’ 식으로 전임 문재인 정부의 실책을 고발하고 각종 역사적 사실과 경제·안보적 기대효과를 복잡한 숫자와 함께 마구, 욱여넣듯 나열했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5792자를 썼다고 해도 이런 접근으론 (지지층 아닌) 다수 국민의 마음을 얻기 어렵다. 원고를 이 따위로 써온 참모는 경질당해 마땅하지만…그럴 수도 없다. 대통령의 빨간 펜이 이런 내용을 낳았다는데 누가 감히 무슨 말을 하겠나.


● “갈등 있어도 만나야” 한다며 왜 국내선 그리 못하나
전임 정부가 망친 한일관계를 복원하겠다는 윤 대통령의 외치(外治)는 옳다. “때로 이견이 생기더라도 한일 양국은 자주 만나 소통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고 협력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말씀도 너무나 옳다. 밖에다 대고는 그렇게 말했던 대통령이 안에선 그리 못할 때, 우리는 ‘위선적’이라고 한다. 취임 일 년이 다가오도록 윤 대통령은 야당과 회동 한번 한 적 없지 않은가.

2017년 5월 19일 문재인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여야 5당 원내대표와 만난 모습. 동아일보DB

대통령이 지적한 대로 “우리 사회에는 배타적 민족주의 반일을 외치면서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는 세력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정부가 강제동원 문제를 풀고 한발 나아가려면 야당의 도움은 필요하다. 방일 뒤 윤 대통령은 야당과 만나 한일회담 결과를 설명할 수도 있었고,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만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하지 않았다. 그러고도 일본 야당이 우리 야당을 만나 설득해준다고 할 때 윤 대통령은 부끄러웠다는 말은 너무했다. 대통령은 왜 남의 나라 사람도 만난다는 우리 야당을 만날 생각도 안하는가.

그러고 보니 윤 대통령이 일본 정치인들이나 언론에 보여준 환한 웃음을 우리 정치인(친윤 빼고)과 언론에 보여준 적 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직 검찰 DNA를 벗지 못해선지 대통령은, 야당은 물론이고 심지어 국민도 (아직 잡아들이지 않은) 피의자처럼 다루는 경향이 있다. 이번 길고도 지루한 23분간의 ‘대국민 담화 수준’을 들으면서 나는 마주치기 싫은 꼰대한테 딱 붙잡혀 되게 깨지는 기분이었다.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