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주요 가요 차트를 역주행한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를 부른 걸그룹 ‘하이키’. 댄스곡 특유의 당김음이나 랩 파트를 조금 덜어낸다면 통기타 반주에 불러도 좋을 만한 노래다. GLG 제공
임희윤 기자
‘요즘 건사피장에 푹 빠졌잖아. 들어봤어?’
지인 A의 낯선 말에 처음엔 ‘피장파장’이나 ‘양장피’를 떠올렸다. 참뜻을 알게 된 것은 포털 사이트 검색 뒤. 걸그룹 하이키의 노래 제목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영케이 작사, 홍지상 작곡 편곡)의 줄임말이었다. 건물 위도 앞도 아닌 사이에서 피어난 장미에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노래 제목부터가 시대착오적으로 보였다. 글로벌 케이팝의 세계에서 ‘Ditto’ ‘After LIKE’ ‘ANTIFRAGILE’ 정도는 돼야 트렌디한 것 아닌가? 외려 더 관심이 갔고 재생 버튼을 누른 뒤 ‘일일일건(하루 한 번 건사피장 듣기)’에 빠져버렸다.
#1.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제발 살아남아 줬으면/꺾이지 마. 잘 자라줘’(이하 ‘건사피장’ 중에서)
‘예쁘지 않은 꽃은 다들/골라내고 잘라내/예쁘면 또 예쁜 대로 꺾어 언젠가는 시들고’
아이돌 시장의 그림자를 은유한 걸까. ‘왜 내버려 두지를 못해/그냥 가던 길 좀 가/어렵게 나왔잖아/악착같이 살잖아’
#2. 이 노랜 올해 1월 5일 조용히 디지털 싱글로 발표됐다. 그룹의 음악방송 활동 종료(2월 12일) 이후 오히려 ‘멜론 TOP 100’에 98위로 슬며시 진입했다(2월 24일). 시나브로 역주행해 최근 멜론, 지니 등 주요 차트의 20위권 문턱까지 치고 들어왔다. 하이키는 지난해 1월 5일 데뷔한 신인. 더욱이 중소기획사 출신이다. GLG란 회사가 처음 제작한 아이돌 그룹이다.
#3. 역주행 시점이 절묘하다. 하이브-SM의 ‘고래 싸움’에 세간의 이목이 온통 쏠려 있는 동안이다. ‘건사피장’은 조용히 피어났다. 최근 몇 년 새 가요계에서는 ‘대형기획사 출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공식이 더 굳어졌다. 하이브, SM, YG, JYP는 그간 축적된 고객 소비 패턴 빅데이터를 정교하게 분석하고 활용해 신인 아이돌 데뷔 초부터 공격적인 마케팅과 물량 공세를 퍼붓는다. ‘필승의 공식’을 체화해 규모로 승부를 보는 ‘큰 건물’들의 시대다.
#5. 가요계에 군림한 ‘대형 건물’ 틈바구니에서 분투하는 중소기획사의 제작자와 매니저들 사이에서도 이 노래가 화제라고 한다. 얼마 전 만난 B 매니저.
“비슷한 처지의 매니저들과 만나 건사피장 이야기로 대동단결했어요. ‘이런 노래가 우리 아이돌에게 왔었다면’ 하고 질투하다가도 이내 ‘이런 노래가 있어줘서 고맙다. 들을 때마다 힘이 난다’며 함께 끄덕였죠.”
#6. ‘내가 원해서 여기서 나왔냐고/원망해 봐도 안 달라져 하나도’
하이키 멤버 중 절반은 사실 꽤 큰 기획사의 연습생 출신이라고 한다. 이른바 데뷔 직전까지 갔다가 회사의 인수 합병과 그 연쇄 효과로 문턱에서 좌절한 멤버도 있다고. 그렇게 ‘작은 건물’에 모여 만들어진 작은 아이돌이다.
#7. ‘건사피장’의 역주행은 노래의 힘, 그 자체가 먼저 가장 큰 엔진이 됐다는 면에서 그간 있었던 EXID, 브레이브걸스 등의 ‘직캠 영상’ 역주행과도 결이 다르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이후 오랜만에 나온 뜻깊은 아이돌 ‘숨듣명(숨어 듣는 명곡)’이 될 것 같다. 노래 속 화자는 후렴구에 이르러 다시 한번 장미를 보며 긍정 에너지를 얻는다.
#8. 바야흐로 꽃 피는 계절이다. 시든 것, 구부러진 것, 가시를 드러낸 것. 이젠 한 송이 한 송이가 달리 보일 것 같다. 깔끔한 동네에 핀 조경용보다 평범한 동네 담벼락 위로 간신히 솟은 한 송이에 더 눈길이 갈지도. 가시를 품어내고 길러낼 때, 살갗 위로 돋아낼 때 얼마나 아팠을까. 이제는 알 것 같다. 나도 어떤 날 많이 아파본 적 있기에.
임희윤 기자 i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