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공주시 반죽동의 대통사지 당간지주(보물 제150호·왼쪽). 돌기둥의 바깥 면에는 굵은 띠가 조각돼 있고 깃대를 고정하기 위한 네모난 구멍도 있다. 이는 백제 때 창건된 대통사가 통일신라 때 상당한 규모로 중건됐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대통사 터의 복원은 궁궐, 능역, 사찰을 잇는 ‘백제 문화 퍼즐’을 완성할 열쇠다. 필자 제공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서기 523년 백제 무령왕이 승하하자 왕자 부여명농이 왕위를 이었으니 그가 바로 성왕이다. 그는 귀족들의 힘이 여전히 강고한 현실에서 생존하기 위한 방책을 모색해야 했다. 고심 끝에 그는 부처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그가 우선 받아들인 것은 ‘왕이 곧 부처’라는 중국 왕실의 불교 신앙이었고, 스스로 인도의 아쇼카왕처럼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려 했다.
그의 바람은 527년 대통사의 창건으로 첫 단추를 제대로 끼웠다. 대통사는 이름과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백제 절이다. 우여곡절 끝에 근래 대통사 터를 찾기 위한 발굴 조사가 속도를 내고 있다. 아직 사역(寺域) 내부까지는 조사하지 못했지만 절터 외곽에서 그 옛날 대통사의 영화를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들이 쏟아졌다. 대통사는 과연 어떤 절이고, 절터 발굴을 통해 백제사의 어떤 비밀이 드러났을까.
말 구유로 쓰였던 보물들
공주 중동 석조로서, 대통사 터에 있었지만 일제 때 헌병대 마당에서 말 구유로 쓰이며 훼손됐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1935년 일제는 이 두 점의 유물을 보물로 지정하면서 군청 석조는 욱정(旭町·현 반죽동)에서 옮겨왔음을 알았기에 ‘공주 욱정 석조’로, 보통학교 석조는 원래의 위치에 대한 자세한 검토 없이 당시의 위치를 그대로 살려 ‘공주 본정 석조’로 이름 붙였다. 그 시점만 하더라도 이 석조들이 본디 대통사 마당에 있던 석조임을 몰랐기에 그리 이름을 붙였고, 광복 후 우리 정부도 그 이름을 그대로 답습해 ‘공주 중동 석조’, ‘공주 반죽동 석조’로 부르게 되었다. 따라서 이제라도 이 석조들에게 제 이름을 찾아줄 수 있기를 바란다.
신라, 일본에서 유행한 ‘대통사 스타일’
암키와 조각은 대통사 터에서 발견된 것.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대통사 터로 지목된 곳은 이미 주택이 빼곡히 들어차 있어 더 이상 구체적 연구로 나아가기 어려운 여건이었기에 우리 학계는 한동안 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던 차에 1990년대 초 부여 부소산성에서 ‘대통’이란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두 점이나 발굴되었고, 1999년에는 이 절터의 당간지주와 그 주변을 발굴한 결과 백제 때의 절터 흔적이 확인되지 않았다. 그에 따라 학계 일각에선 대통사의 위치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그러나 2011년에 이르러 반전의 계기가 생겼다. 공주시가 이 일대의 경관 개선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이후 10여 년간 소규모 발굴조사가 여러 차례 실시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대통’, ‘대통지사(大通之寺)’란 글자가 새겨진 기와, 연꽃무늬 수막새, 흙으로 빚은 불상 조각 등 중요 유물이 다량 출토됐다. 마침내 대통사의 위치를 둘러싼 논란에 마침표가 찍혔다.
민가에 파묻혀 있는 백제 最古의 절터
현재 공주에는 공산성, 무령왕릉과 백제 왕릉원 등 두 건의 세계유산이 있다. 만약 장차 그것에 대통사 터가 더해진다면 궁궐, 능역, 사찰이 결합된 백제 문화의 실체가 더욱 뚜렷해질 것 같다. 이처럼 대통사는 웅진기 백제사 해명에 반드시 필요한 큼지막한 퍼즐 조각인 셈이다. 그러나 이토록 중요한 대통사 터는 지금도 민가 아래에 파묻혀 신음 중이다. 물론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재산은 보호되어야 마땅하다. 따라서 장차 주민들의 이익과 유적 보존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묘안이 찾아지길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 대통사 가람의 구조가 밝혀지고 복원 정비가 이루어지는 날, 타의로 절터를 떠난 석조물들이 원위치로 모여 웅진기 백제 문화를 웅변하는 상징물로 우뚝 설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